산문 - 필사 +

사람의 땅 / 이윤기

칠부능선 2010. 8. 29. 11:27

 

사람의 땅

-이윤기


  어느 날 땅의 신이 새벽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여유를 주겠다. 제각기 괭이를 하나씩 들고 빈 들로 나가  땅에다 세모가 되었든 네모가 되었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금을 그어 각자 자기 몫의 땅을 차지하도록 하여라. 세모가 되었든 네모가 되었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너희들이 그려내는 땅의 소유권은  그것을 그린 사람 것이 되도록 하겠다. 크게 그리든 작게 그리든 상관없다. 그러나 해 떨어지기 직전까지는 반드시 떠난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세모가 되었든 네모가 되었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반드시 하나의 도형이 완성되어야 한다. 자, 그러면 어서 괭이를 끌고 길을 떠나 너희 근기에 맞는 땅을 차지하도록 하거라.」

  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괭이로 땅에다 도형을 그립니다. 한 시간 만에 지름이 오 리쯤 되는 동그라미를 그린 사람도 있고, 다섯 시간 만에 한 변의 길이가 20리쯤 되는 세모꼴을 그린 사람도 있고, 열 시간 걸려 한 변의 길이가 30리쯤 되는 큼지막한 네모꼴 그린 사람도 있습니다. 땅의 신은 각각 그 근기에 맞게 세모꼴이 되었든 네모꼴이 되었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그것을 그린 사람에게 그 땅의 소유권을 넘겨줍니다.

  개중에는 좀 유별난 사람이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도 괭이를 끌고 빈 들로 나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세모가 되었든 네모가 되었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해지기 전에 도형 그리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그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도무지 그림꼴 마무리 지을 생각은 않고 빈 들로 나가기만 합니다. 한 친구가, 해지기 전에 그리기를 마치려면 그쯤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빈들로 아주 나가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오가 된 뒤에야 방향을 바꾸었다가 한참을  더 내달은 뒤에야 떠난 자리를 향하여 되돌아오기를 시작합니다만, 불행히도 해 떨어지기 직전, 거대한 동그라미를 마무리짓기 직전, 지나친 체력의 소모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제 근기에 맞게 땅 차지한 것을 자축하던 친구들은 이 사람의 죽음에서, 사람은 분수에 맞게 깜냥껏 처신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을 테지요.

  네 주일 동안 자동차로 북미대륙을 돌아와서 씁니다. 약 만 6천 킬로미터를 돌아올 동안 여러 가닥의 생각이 내 머리를 차례 없이 맴돌고는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생각, 자연에 대한 생각, 환경에 대한 생각이 당연히 빠질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생각이 바로,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이 우화입니다. 이 우화는 때로는 세모꼴로 때로는 네모꼴로 때로는 동그라미로 내 마음속을 맴돌고는 했습니다. 서울을 다녀온 지 오래지 않고, 또 미국의 여러 대도시에서, 한국의 옛 친구들과 친지들을  만난 뒤여서 그랬습니다. 나의 옛친구나 친구들은, 한국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거의 예외없이 이녁이 그려내고, 마침내 그 소유권을 차지하게 된, 세모꼴 같기도 한 땅을 한 자락씩 가로 앉아 벌써 하나의 풍경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땅을 차지하지 못한 채 괭이를 끌고 빈 들을 헤매는 친구를 딱하게 여기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디다. 아직도 벌건 대낮인데 일몰 걱정은 당치 않은 것이지요.

  나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그대가 나날이 얻어 들이는 정보, 나날이 읽어 들이는 교양이 무엇으로 바뀌는지 보여 다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그대가 우겨넣는 나날의 먹거리가 뱃속에서  소화되어 무엇이 되는지 보여다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나는 이 여행 끝에 이제 이런 생각을 하나 덧붙이게 됩니다.

  「세모꼴이 되었든 네모꼴이 되엇든 동그라미가 되었든 그대가 그 소유권을 차지했다고  생
각하는 땅을 보여 다오.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나비는 수심을 몰라서 바다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이렇게 노래한 시인은  김기림이던가요.  올리버 크롬웰은, 사람은 어디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지 모를 때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간다고 했지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