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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를 불태우지 맙시다 / 이윤기

칠부능선 2010. 8. 29. 15:53

루거를 불태우지 맙시다

이윤기



  미국의 어느 대학 도시 쇼핑센터에서 겪은 일입니다.
  물건값  셈하려고 계산대 앞에 서자 아르바이트하는 남자 계원이 이러는 겁니다.
  「오하요우 고자이마쓰?」
  아니다, 임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니하오마?」
  그것도 아니다, 임마…… 나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제서야 계원이 제대로 인사합니다.
  「안녕하쉽니카?」 나는 그제서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국인 , 중국인, 일본인은 구분하기가 참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여러 나라 인사법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객에게 친근감을 주려고 여러 나라 인사법을 배워요. 나는 15개 국어 인사말을  아는데, 문제는 고객의 국적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계산을 끝마치고 계산대를 나오는데 계원이 내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끄너……」
  ‘끄너’가 무슨 말일까 싶어서 물어보았어요.
  「‘안녕’이라는 말 아닌가요?」
  나는 그 말,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기숙사 한국인들은 작별 인사할 때 꼭 그러데요.‘끄너’하고요……」
「에이, 전화할 때만 그렇지……」
돌아서서 웃었습니다. 언어의 세계에서 단어의 의미 전이는 이렇듯이 변화무쌍한데 이것이 번역가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전을 열면 말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합니다. ‘제록스’와 ‘샴푸’는 상표명이 ‘복사하다’, ‘머리감다’는 의미의 일반 동사로 바뀐 대표적인 영어에 속합니다. 사전을  열어야 그렇게 바뀐 속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호치키스’는 원래 기관총 상표명입니다. 전쟁이 끝나 기관총이 잘 안 팔리니까 그 기관총 탄창에 총알 쟁여넣는 기술을 원용해서 만든 것이 우리가 아는 호치키스인 것입니다.  나는 남의 오역을 지적하고 그걸  씹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것만 모으면 포복절도할 읽을거리가 되겠지만 않지요. 번역가에게 오역은 숙명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판에 남의 손톱 밑의 가시 걱정이라니 당치  않지요. 그러나 번역하는 사람이 사전 안 갖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뜻에서 하나만 소개합니다. 나는 십수 년 전 어떤 소설  한국어 번역판에서 “그는 자기의 루거를 불태웠다.”는 문장을  읽고는 웃었습니다. 원문을  확인할 것도 없이  “He fired his Luger"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루거’는 독일제  9밀리 권총의 상표명입니다. 따라서 그 문장의 정확한 번역은 ‘그는 권총을 쏘았다’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전을 너무 믿으면 안 되지요.  까닭을 다 쓰려면 따로 책 한  권이 실히 되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전은 길라잡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실려 있는 말은 화석화한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옥의 언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펄펄 살아 있는 말이 아닙니다. 시장의 언어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전의 말을 좇아 번역해 놓으면 죽은 문장이 되어버리지요. 얼마나 죽는지 예를 들어볼까요?
  「This confirms the authenticity and antiquity of myth(이것이 신화의 확실성과 고유성을 확증한다).」
  흔히 대할 수 있는 번역입니다. 사전을 펼쳐 놓고는 이렇게  밖에는 번역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책들이 이런 역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통탄합니다.  일본의 고약한 본을 본 증거인 것이지요. ‘확실성과 고유성을 확증’한다니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합니다.그러나 다음과 같은 진짜 의미는 전해지지 않지요.
  「이것만 보아도 신화가 얼마나 우리 삶에 닿아 있는 것,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에이, 어디 신화만 그런가요?
  번역도 그런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