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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놈, 저금하는 놈 2 / 이윤기

칠부능선 2010. 8. 29. 16:02

공부하는 놈, 저금하는 놈 2

이윤기



  학교와 불화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학교와의 불화는 공부와의 불화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저금을 따로 하지 않는 나에게는 공부가 저금이다.

  나는 《명심보감》에서 읽은 동악성제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철석같이 믿는다고 썼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爲善人〕은 봄 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자라는 바 있으나,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爲不善人〕은 칼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날이 닳고 있는 것”이라는 옛글의 가르침을 지금도 믿는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었다.

  나는 선한가? 나는 선하지 아니한가?

  고등학교 들어간 해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학교와 교회가 금지하는 것들만 좋아했다.

  나는 나에게 금과옥조 같은 동서양의 고전(古典)만을 좋아했는데 학교에서는 쓰레기 같은 것만 배우기를 강요했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는데 학교는 영화관 출입하는 나를 쓰레기로 취급했다.

  나는 음악 감상실 드나들면서 고전음악 듣기를 좋아했는데 학교는 쓸데없는 음악이론만 나에게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그 시절에 이미 막걸리 마시기를 즐겼으니 학교 쪽에서 보면 불량학생이라도 그런 불량학생이 없었다. 나는 절에 드나들기를, 굿판 따라다니기를 즐겼으니 교회 쪽에서 보면 그런 우상숭배와 신성모독이 따로 없었다.

  나는 《사도신경》 외기를 한사코 거절했다.《사도신경》을 외지 못하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 나는 세례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불선인’인가? 불선不善은 악惡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걸 누가 규정하는가?

  규정의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선악의 잣대에 과연 항복해야 하는가?

  선은 악의 한 과정은 혹시 아닌가? 악은 또 다른 선의 한 과정은 혹시 아닌가?

  나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머리카락 박박 밀지 않는다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학교를 너는 왜 용인해야 하는데?

  술 마시다 걸리면 정학 처분 내리는 데를 왜 드나들어야 하는데?

  무슨 권리로 때리고 무슨 권리로 벌을 주는데?

  나는 동악성제의 가르침을 점검해보고는 또 한 차례의 소스라침을 경험했다.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선’과 ‘불선’은 선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도가道家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무래도 ‘공부’에 대해서 쓴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루 공부한다고 해서 현명함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지에서는 멀어진다. 하루 나태하게 군다고 해서 무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명함에서는 멀어진다. 공부하는 사람은 봄 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자라는 바 있으나,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칼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날이 닳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학교는 공부하게 하는 곳이 아니었다.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곳이었다. 내가 보기에 교회는 당시의 내 눈높이에 맞추어 내가 선택한 곳이지 내 눈높이를 돋우어주는 곳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와 교회를 떠났다.

  학교와 교회를 떠나고 보니 고전의 바다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공부해둔 일본어로 고전읽기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나는 예수의 신비스러운 인격이 쏟아낸 말씀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한사코 막지도 않고, 부처의 말씀의 향기를 한사코 외면하지도 않게 되었다. 노자와 장자는 어린 시절 나의 큰 스승들이었다. 오랫동안 밥맛 없어하던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요즘 나에게 이따금 악몽을 안기는 말 한마디가 있다.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는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의 생물학적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뜻일 터이다. 죽고 나서 10년 뒤에 작품이 남지 않는다면 그것이 작가의 진정한 죽음이라는 뜻일 터이다.

  내가 손을 잡아본 작가나 시인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독자의 기억에 머무는 작가나 시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점의 진열대에 저서가 올라가 있는 작가나 시인은 그보다 훨씬 그 수가 적다. 작가나 시인의 생물학적 죽음과 함께 그들에 대한 기억까지 깡그리 사라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지만 10년 뒤에도 책이 살아남아 있다면 그것도 근사한 일이 아닌가?

  나는 많은 책을 번역하고 많은 책을 썼다.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내 책들이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나와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징표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오래오래 남아 읽힌다면 그것도 근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노자, 장자, 공자의 어록은 어떤가? 2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있지 않은가?

  부처의 말씀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 어떤가?

  셰익스피어 역시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도 펄펄 살아 있다.

  나는 세월로부터 검증받지 않은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나에게는 10년 뒤에 쓰레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나에게는 가장 오래된 책, 가장 오래 살아남은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책이 여기에 속한다. 여러 나라 신화 책이 여기에 속한다. 기나긴 세월의 터널을 지나 날빛 아래로 드러난 신화는 나에게 또 하나의 미궁이기도 하다.

  나에게 고전은 ‘아리아드네의 실꾸리’ 같은 것이다. 영웅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었던 바로 그 실꾸리 같은 것이다. 나도 미궁 탈출을 시도하고 싶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실을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으니 시인 윌리엄 스태퍼드(1914~1993)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대가 붙잡고 따라가는 한 가닥 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이 실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걸 잡고 있는 한, 길 잃을 염려는 없지.

      슬픈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다치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그대 역시 고통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겠지

      세월이 펼치는 것은 그대도 막을 수 없으니

      오로지 실만은 꼭 붙잡되, 놓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