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산불로 크는 나무 / 이윤기

칠부능선 2010. 8. 29. 12:04

 

산불로 크는 나무

-이윤기


  북미대륙을 한 바퀴 돌아온 뒤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이거 혹시, 지혜열이 아닌가 싶네요.  아이들 키우면서 자세히 보니까, 저희들에게 벅찬 것 하나씩 익힐 때마다 아이들은 크고 작은 열병들을 하나씩 앓고는 하더군요. 이걸 지혜열이라고 한다는데, 내가 앓고 있는 것이 지혜열이라면 대륙 일주 여행의 크기가 내 지진한 정신에 벅찼기 때문일까요?

  설마 그렇기야 하려고요?  비록 요즘 들어서  한동안 한반도 남쪽에 쪼그리고 살고 있을망정, 우리도 원래는 대륙을 누비면서  살던 백성이 아닌가요.  나의 이  열병은 따라서, 여행 끝난 뒤에, 자주 사람을 헛갈리게 하던 대륙의 체험을 차근차근 소화하려는 데서 오는 피곤이기가 쉽겠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세코이아 국립공원에 서 있는  수천 그루의 세코이아 나무는 나를  헛갈리게 한 것 중의 하납니다.

  책을 통해서 보기는 많이 보아서 알고는 있었지만, 과연 크기는 크더군요. 높이가 자그만치 백 미터, 지름이 12미터나 됩니다. ‘아름’은 이 나무의 크기를 재는 단위로 벅찹니다. 둘레가 37미터에 육박하니까 이 나무를 감싸 안으려면 장정 22명이 둘러서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가장 큰 세코이아의 바닥 단면을 대충 계산해 보았더니 28평이 가까이 되더군요. 나이도 놀랍습니다. 개중에는 수령이 무려 3천 2백 살이 되는 세코이아가 있다니까 역사연표 들여다보는 일이 새삼스러워집니다. 나이테가 보이도록 잘라놓은  단면이 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니, 예수님 태어나신  해의 나이테가 한 중간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1940년대는 언감생심…… 세코이아의 주변문화에 불과합니다.

  세코이아 국립공원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북부에 위치합니다. 세코이아는 눈이 많은 고산 지대에 군생해 있더군요.  적설량이 많은 고산에서 살아남자면 몇  가지 생존 조건이 필요합니다.  키가 커야 하고, 곧아야 하고, 가지가 적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세코이아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키가 백 미터에 가까워도 가지는 수도 적을 뿐더러 짧고 볼 것이 없습니다.  나무가 어찌나 곧게 서 있는가는, 이 거대한 세코이아의 뿌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천 톤이 넘는 이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는, 깊이 겨우 한 길에 불과합니다.  옆으로도 30미터 이상은 뻗지 않고요. 따라서 지반침하 같은 자연적인 이유로 조금이라도 기우는 날이 이 나무가 수명을 다하는 날입니다.

  무게 천 톤이 넘는 이 나무의 유일한 천적이 인간이었다는 설명이 우리의 가슴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이 신성한 나무는 19세기의 벌목군들 손에서도 살아남게 됩니다.  무르면서도 제재해 놓으면 툭툭 잘 부러지는 재질이 결국 이 나무를  살리게 되니, 장자님 말씀이 옳은 거지요.

  세코이아 숲에 연기가 자옥하게 피어올라서  산불이 난 줄 알고 자동차를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내 표지가 있더군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부러 지르고 통제하는 산불이니만치 놀라지도 말고 신고하지도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불을 지르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거대한 세코이아는, 정기적으로 산불이 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나무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세코이아의 덩치가 그렇게 커도 솔방울은 조금 더 두꺼울 뿐 여느 솔방울과 다름이 없고 씨앗의 무게는 겨우 0.05그램에 지나지 않습니다. 발아하려면 대지와 접촉해야 하는데 이렇게 작고 가벼운 씨앗은 낙엽층 대문에 땅과 접촉할 방법이 없을 뿐더러 요행히 발아한다고 하더라도 햇빛을 볼 수 없어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발화로 인한 정기적인 산불로 세코이아 씨앗은 세 가지 혜택을 누립니다. 낙엽이 타는 덕분에 두꺼운 솔방울 속에 있던 씨앗은 대지와 접촉할 수 있게 되고, 낙엽이 사라진 덕분에 햇빛을 볼 수 있으며, 낙엽의 재가 훌륭한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산불에 힘입어 싹을 띄우기만 하면 1년에 약 30센티미터씩 자라 백 년  뒤에는 약 30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실로 창대한’것이지요.

  세코이아를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큰 것은 이렇게 크는 것이구나.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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