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문간방 사람 / 손광성

칠부능선 2010. 8. 14. 08:51

문간방 사람

손광성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문간방 저쪽은 바로 한길이기 때문이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불면으로 괴로워한다. 밤에는 골목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일찍 잠들 수 없고, 아침에는 두부 장수의 요령 소리에 잠을 설친다. 그러다가 우유 배달부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그 빈약한 잠에서마저 결국 깨고 만다.

  사람이면 누구나 참을성이 있어야겠지만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더 많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골목에서 들리는 여인네들의 수다떠는 소리도 참아야 하고, 마을 아이들의 소란과 아우성도 참아야 한다. 설사 야구공이 창문을 부수고 날아드는 이변이 생긴다 해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

  대학 시절이었다. 친구와 함께 제기동 어떤 집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는데, 벽을 사이에 둔 저쪽은 밤만 되면 공중변소였다. 물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이마에 쏟아지는 꿈을 꾸다가 깨면, 술이 취한 사람이 창문 밑에 대고 소피를 보는 중이었다.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그는 계속 누구에겐가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문간방에 살려면 이런 불쾌한 일이 설령 매일 밤 일어난다고 해도 웃어넘길 만한 아량이 있어야 한다.

  도둑들도 문간방에 사는 사람을 우습게 여긴다. 눈을 멀겋게 뜨고 있어도 들창으로 검은 손이 들어와서는 못에 걸린 옷가지건, 선반 위에 놓아둔 가방이건 마치 제 물건 들어내듯이 한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문패를 건다”는 말이 있다. 주제넘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 이름 석 자도 버젓이 내걸 수 없는 것이 문간방에 사는 사람의 처지이다. 그래서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문간방 남자’요 ‘문간방 여자’요, ‘문간방 아이’로 통한다. 그가 비록 전주 이씨 충녕군파의 종손이라 해도 문간방에 사는 한 그저 문간방 사람일 따름이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이 제일 슬퍼질 때가 있다.

  자기 아이가 주인집 아이와 싸웠을 때이다. 이겼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는 다음날부터 다른 셋방을 찾아나서야 한다. 하지만 아기가 있으면 셋방을 주려고 들지 않으니 더 슬프다. 그러니 문간방에 살려면 아이가 없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있다고 해도 주인집 아이보다 힘이 세어서는 못쓴다. 그렇다고 울지도 않고 힘도 약한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으니 슬프다.

  하지만 문간방에 산다고 해서 늘 슬픈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몸채 사람들이 놓쳐버린 그런 이삭 같은 재미가 있어 팍팍한 삶에 조그만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추운 날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오래도록 대문 밖에 세워두지 않아도 된다. ‘똑똑’ 창문만 두어 번 두드리면 그것이 친구인 줄 알고 얼른 나가 맞아들일 수 있어 좋다.

  출근할 때는 주인보다 한 발 늦게 출발해도 늘 한 발 앞서게 마련이니 버스를 놓칠 염려가 그만큼 적고, 좀 얌체짓 같지만 신문 구독료 같은 것은 내지 않아도 된다. 대문간에 떨어지는 신문 소리를 먼저 듣는 것은 문간방에 사는 사람이다.

  게다가 들창 밑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를,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듣는 것도 전혀 재미없는 일만은 아니다. 고해 신부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떤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굳게 다문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할 때도 있으니까.

  어떤 때는 금세 끊기고 마는 그 짤막한 이야기가 오래 전에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만 어떤 영화의 대사를 다시 생각나게 할 때도 있다.

  “나 죽으면 님자, 그래도 울어주갔디?”

  “못난 양반, 흘릴 눈물이나 남겨두었수?”

  술 취한 남편을 부축해가면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땀과 눈물과 웃음과 용서가 배어 있다.

  “이놈, 두고 볼 테다. 내 눈을 빼서 네놈 집 대들보에 걸어두고라도, 네놈 망하는 꼴을 지켜볼 테다. 이노옴!”

  가슴이 섬뜩하다. 누가 저토록 그를 분노케 했을까? 그의 저주에는 선혈이 낭자하다. 사람이란 정말 선한 동물일까?

  그러나 간혹 이런 슬픈 대사가 자막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갈 때도 있다.

  “그때 나가지 않은 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입고 나갈 옷이 없었어요.”

  이런 대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아파온다. 지금 저 고백을 듣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일까? 아니면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 해서 그 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이처럼 만나게 된 그 남자일까?

  대사와 함께 눈물이 글썽한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 되어온다. 그리고 이런 노래가 배음(背音)으로 깔린다.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그러나 그런 슬픈 대사도 잠시 뿐, 어느덧 하루해도 저물고 나면 문간방은 깊은 어둠에 파묻히고 만다. 그리고 문간방 사람들도 일상의 고달픔에서 풀려나 꿈 속으로 조용히 잠겨든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꿈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꿈 속에서 그는 가끔 왕이 된다.

  아침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궁전, 양탄자처럼 보드라운 잔디밭, 그리고 깔깔거리며 근심 없이 뛰노는 그의 어린 왕자와 공주들…….

  우유 배달부의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망쳐버릴 때까지 그의 꿈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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