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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리 눈길을 걷고 / 이덕무

칠부능선 2010. 8. 1. 20:22

 

칠십 리 눈길을 걷고

이덕무



  때는 계미년(1763) 늦겨울 12월22일이다. 나는 누런 말에 걸터앉아 충주로 가기 위해 아침녘에 이부利富고개를 넘었다. 얼어붙은 구름이 하늘을 꽉 메우더니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하였다. 가로 누워 날리는 눈발은, 마치 베틀 위에 씨줄이 오가는 듯, 어여쁜 눈송이가 귀밑터럭에 내려앉아 내게 은근한 정을 표현하는 듯하였다. 앙증맞은 느낌이 들어 머리를 쳐들고 입을 크게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산속에 난 작은 길들이 가장 먼저 하얗게 바뀌었다. 먼 곳에 있는 소나무는 검은빛을 띠었다. 물이라도 든 양 푸른 소나무는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겠다.

  말라버린 수수깡이 밭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데, 눈이 바람을 몰고 스쳐 지나갈 때마다 휘익휘익 휘파람을 분다. 수수깡의 붉은 껍질은 꺾인 채로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그 모양이 초서草書를 쓴 듯 자연스럽다.

  말라버린 채 뻗은 수풀의 가지에 앉은 암수 까치는 대여섯 마리나 예닐곱 마리쯤 될까. 몹시도 한가로워 보였다. 부리를 가슴에 파묻고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자는 듯 마는 듯한 새도 있고, 가지에 붙어 제 부리를 가는 새도 있고, 목을 에두르고 발톱을 들어 제 눈을 긁는 새도 있다. 어떤 새는 눈이 정수리에 쌓이자 몸을 부르르 떨어 눈을 날려 떨어뜨린다.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주시하니 나는 모양이 말이 비탈길을 달리듯 빠르다.

  눈이 쌓여 축 처진 가지가 어깨를 친다. 손바닥을 위로 펴서 눈을 받아 씹으니 맑은 향기가 감돈다. 눈에다 침을 뱉자 눈이 파랗게 바뀐다. 팔짱 낀 팔굽에 떨어져 쌓인 눈이 턱까지 닿은 듯하지만 털어버리고 싶지 않다.

  따라온 마부는 주름이 잡히지 않은 뺨이 불그레하고, 왼쪽 구레나룻은 숯검댕이 같은데 오른쪽 구레나룻은 … 과 같다. 눈썹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을 보고 껄껄껄 웃다가 갓끈이 끊어질 뻔했다. 팔뚝에 쌓인 눈이 말갈기로 쏟아졌다. 나는 또 웃었다. 눈이 서쪽으로 날려 오른쪽 눈썹에만 달라붙는다. 구레나룻도 눈썹을 따라 하얗다. 사람이 늙어서 하얀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나는 수염이 없어 눈동자를 굴려서 내 눈썹을 치켜보니 왼쪽에 있는 눈썹이 유독 하얗다. 또 하하하 웃다가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저쪽에서 오는 사람과 내 쪽에서 가는 사람의 눈썹이 좌우를 바꿔 하얗다.

   덤불이 우거진 곳에 쭈그린 암석이 곱사등이가 되어 몸을 구부린 듯 버티고 있다. 정수리는 흰 눈을 이고 있으나 우묵하게 들어간 배는 눈이 쌓이지 않아 살짝 거무스름한 것이 찡그린 꼴이다. 귀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모양이 어찌 보면 호랑이를 닮기도 하였다. 말이 히히힝 코를 불며 앞으로 가려 들지 않는다. 마부가 냅다 소리를 질러 꾸짖어서야 억지로 걸음을 떼었다.

  느긋하게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무릇 칠십 리 길을 가는데 두메산골이 아니면 들녘이다. 나무 찍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거늘, 사방을 휘 돌아보아도 나무꾼은 숨어서 보이질 않는다. 하늘과 땅은 맞붙어서 어슴푸레하게 수묵을 풀어놓은 듯 드넓게 넘실댄다. 뉘라서 이렇게 짙게 물감을 풀어놓았을까.

  넓고 먼 들판이 시야에 들어와, 저문 강의 안개 낀 물가 풍경이 홀연히 산골짜기와 들판 사이에 펼쳐져 저것이 무엇일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돛대가 은은하게 안개 너머에서 때때로 출몰하고,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노인이 고기를 메고 낚싯대를 끌면서 마을 어귀에 어렴풋이 보인다. 청둥오리가 끼욱끼욱 울면서 떼를 지어 날아와 나무에 모여들고, 저 멀리 햇볕에 말리는 어망이 능수버들 숲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풍경을 분간할 수 있다.

  의아함을 견디지 못하여 마부에게 물었지만 마부도 나와 같다. 길 가는 나그네에게 물었더니 나그네는 마부와 같이 빙긋이 웃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이편으로 갔다. 갑자기 멀리 보였던 풍경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다. 저문 강의 안개 낀 물가 풍경은 다름 아닌 황혼이 어둠으로 변하는 것이요, 돛대가 은은하게 보였던 것은 낡은 초가집이 장마를 겪어서 기둥과 통나무를 드러내놓고 서 있는데 백성이 가난하여 지붕을 이지 못한 모습이다.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노인이 고기를 메고 낚싯대를 끌었던 모습은 두메산골에서 나오는 사냥꾼으로, 물고기는 꿩이고 낚싯대는 지팡이였다. 청둥오리는 오리가 아니라 검은 갈가마귀였고, 들에 사는 백성이 짜놓은 울타리가 가로세로 얼기설기 되어 있어 어망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빙긋이 웃은 나그네는 내가 잘못 본 것을 비웃은 게로구나!

  곤주昆珠의 주막집 호롱불 밑에서 쓴다.





*이덕무 / 1741~1793) 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이자 시인이자 산문가이다. 한성 중부 관인방 대사동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을 거처로 살았다. 그의 본관은 전주 이씨고, 자는 무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