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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 전혜린

칠부능선 2010. 6. 23. 14:42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 전혜린

 

 

  사랑만이 우리를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새다.
  많은 사랑을 적당한 방법으로 받고 자라난 사람만이 정상적인 정서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부드러운 풍요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생래의 두 가지 본능이 있다. 하나는 타인 또는 사회로부터 자기(또는 자기의 재능, 기타 어떤 형태의 현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충동이고 또 하나는 남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본능은 몹시도 강하게 우리에게 집착하는 내면적 욕구이다.

  순탄하게 정상적이고 절도 있는 범위 내에서 풍요하고 만족스럽게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위대함의 가능성이 컸다 하더라도 이 기본 조건의 상위는 꼭 그들의 생이나 작품이나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정도의 천분을 가진 두 작가의 경우, 풍부하고 정상적인 애정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와 반대되는 사람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작품 속에 그들이 받고 자란(또는 못 받고 자란) 애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괴테의 모든 작품에 깃든 자족한 고요, 풍요한 조화는 그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양친의 조화된 생활을 생각함이 없이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온갖 정열이나 회오에서도 온건함과 절도 내지 품성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중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용은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린 시절 및 양친의 생활과 훈육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떤 교육도 암시, 모방 또는 반발에의 이상의 무엇일 수 없다는 이론을 긍정시켜 준다.

  다시 말하면 결과로 보아서 부모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행위를 보고 무의식 중에 모방하고 또는 의식적으로 반발한다. 그들의 명령과는 관계 없이...... 여기에 부모의 역할에 어려움이 놓여 있는 것이고 여기에 괴테적인 조화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그의 재질과 물론 무관하게)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원인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내부에 정리되지 못한 여러 가지 복합 현상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거의 전부 부모의 부조화된 사랑 또는 일분의 편애 또는 학대, 무관심 등에 그 제일 깊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잘못으로 어린 아이의 정서가 정상적인 단계로 발육을 못하고 억압되었을 때 그 억압된 정서는 의식 밑으로 들어가서 병적 증후로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능 발달의 단계는 유년기에는 자기애(나르시시즘), 다음에는 자기와 비슷한 모습과 성격을 가진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동성애를 거쳐서 이성인 타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하는 이성애의 시기로 옮겨 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의 발달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을 경우에 본능은 하급의 발달 단계에 고착해서 완전한 이성애로까지 발달하지 못하고 도착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새디즘, 매저키즘 또는 이상 성격이 그 결과이며 인간의 정신갈등은 요컨대 전적으로 나와 본능과의 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보고 있다. 어려울 때 우리가 받은 애정, 다시 말하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애정을 우리가 길러 받은 정도 여하에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인가 아닌가의 키 포인트가 있다는 것이다.

  맹목적적인 동물적 사랑은 백해 무익이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특히 유아기의 우리에게는 햇빛보다도 부모의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애정 속에서 어린이가 잔인한 인간, 무궤도한 반사회적 내지는 위법적 인간으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와 반대로 냉혹하고 무관심한 가정에서 소망되지 않은 아이로 탄생해서 온갖 부드러운 정서를 의식 밑에 몰아 넣어야 하는 유년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됐던 사람한테서 우리는 그가 선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과장된 과격한 정서와 열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만약 그 외의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 베리는 몹시 극단적이고 병적인 만큼 애정에도 증오에도 집념이 강한 이기주의적인 인간으로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그의 생은 실패로 끝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통한 기행과 병적 발작과 고뇌는 그의 유년기에 이미 싹텄었다. 주인과 식모 사이에 생긴 '소망되지 않는 아이'였던 그는 일생 동안 그의 출생의 수치와 아버지의 냉담과 어머니의 경멸을 극복하지 못했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그릴파르처도 조화되지 않은 부모의 문제성을 그대로 반영한 억압과 복합에 넘친 폐쇄적인 성품의 인간이었고 작품 속에서의 승화 작용 이외의 그의 생은 역시 하나의 실패작으로서 가정도 아이도 가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릴케도 엄격한 아버지와 경박한 어머니의 무지와 이별로 아버지 혼자의 손으로 키워진 유년 시절의 소유자다. 그 자신의 결혼에 의한 내면적 안정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생 동안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고통을 느낀 결과 비정상적일 만큼 여성에 정신적 동경과 관심을 갖고 방황했다. 베토벤의 가정적 불행과 그의 생의 어두움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재능의 개화는 왕왕 이러한 모순된 성격의 대립 속에서 끊임 없는 승화에의 의지 속에서만 가능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천재를 안 가진 범인은 높고 아름다운 것 속에 자기의 억압을 높여서 표현하는 대신 여러 가지의 이상 현상(남을 해치고 싶은 욕망, 또는 자학 또는 기타의 병적 발작) 속에 배설하려고 하는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애정이 없는, 또는 양친이 화목하지 못하고, 조화되지 않은 가정에서 아이 속에 있는 애정을 눌러 없애는 방식으로 기르는 교육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청소년의 범죄가 많다고 한다. 특히 온 집안을 살해한, 전에 수재였다는 청년의 경우도 최근에 있었다. 그 청년의 과격하고 비정상적인 행위의 원인은 물론 부모에게 있다. 행위를 결과로만 보지 않고 원인에서 본다면 부모 쪽에 몇 배의 책임이 있다.

  사랑을 받은 일도 없고 자기 내부에 있는 사랑마저 완전히 눌러 버려진 아이가 자라나서 냉혹하고 과격하고 인간의 존귀성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애정의 햇빛을 담뿍 쬐어 주어 잘 자라게 하지는 않고 어린 싹을 짓누르려는 전연 비협조적이고 오히려 파괴적인 태도로 임하고 있다가 그 나무가 자라서 다른 나무와 같이 무성하고 싱싱하지 않다고 우리는 욕할 수가 있는 것일까? 청춘 시대는 직관과 감각이 예민하고 순수하며 세계 전체와 자기 자신에 대해 요구가 높고 많은 교만한 시절이다. 따라서 이 시절에 더욱 범죄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슈닛츨라의 ≪테레에제≫의 아들, 또 그와 유사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아들 중 젊은 범인들의 무리가 전부 불행한 가정의 소산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랑만이 우리 인간을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소라는 것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애정을 조금도 구김 없이 발달시켜서 그 애정을 남에게 순수하게 쏟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일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한 사람에게만 사회에의 연대감, 타인에의 책임감과 박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랑 속에 자라나고 사랑을 지닌 사람은 반사회적이거나 위법적일 수가 없으며, 사랑을 모르고 자라나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에 있어서 반사회적 위법적일 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온갖 청년의 범죄를 볼 때 그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그려지고 한편 구석에서 손가락을 빨거나 매를 맞고 울고 있거나 하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오랜 억압의 생활은 지옥보다도 길었으리라고 동정이 가고 결국 그를 도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도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나쁜 것은 언제나 아이가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마치 나쁘게 자란 나무의 책임이 정원사에게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