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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 목성균

칠부능선 2010. 1. 27. 21:50

 

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목성균

 

 

  고향의 초가삼간은 동향집이었다.

  망종亡種 무렵, 앞산 유지붕 위로 해가 떠오르면 동향집은 해일海溢같이 쏟아지는 햇살에 어뢰를 맞은 함정처럼 여지없이 침몰했다. 떠오르기 전에 아버지는 침몰하는 함정의 함장처럼 결연하게, "어서 들로 가자!" 하시고 소를 몰고 앞장서서 삽짝을 나서셨다. 아버지의 그 결연한 의지에 식구들은 연장을 챙겨들고 퇴함退艦을 하듯 아버지 뒤를 따랐다. 그러면 초가삼간은 조용히 눈부신 햇살 속으로 침몰했다. 해 돋는 쪽으로. 

  고향. 그러면 초가삼간은 조용히 눈부신 햇살 속으로 침몰했다. 해 돋는 쪽으로 앞을 둔 동향집은 남향받이는 부엌궁둥이뿐이다. 식구들이 퇴함하듯 들로 나가고 나면 해님은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신랑 새댁 궁둥이 탐닉하듯 온종일 바람벽에 머물렀다.

  동향집의 부엌궁둥이는 다산多産한 아내의 돌아앉은 궁둥이만치나 편하고, 은근하고, 따뜻한 곳이다. 그러나 동향집 사람들은 부엌궁둥이의 그걸 모르고 살았다. 퇴함하듯 삶에 쫓기는 사람들이 어찌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은연隱然하게 서 있을 여유가 있었으랴.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추울 때다. 하루 종일 햇볕에 단 부엌궁둥이에 기대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본 적이 있다. 부엌궁둥이가 그렇게 따뜻하고 은밀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지 나는 저녁 밥상이 들어갔는데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엌궁둥이로 들어가서 숨었다. 고샅에서 할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서는 “그놈에 자식, 밥도 주지 말어.” 하시는 아버지의 역정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바람벽에 외로운 신세를 기대게 될 줄을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남향의 바람벽이 동지섣달 맏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뚜막처럼 따뜻했다. 거기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두운 산등성이 위로 돋는 별을 바라보니까 서러웠다.

  그 후 새신랑인 나는 꽤 여러 번 해질 녘이면 부엌궁둥이의 바람벽에 기대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보았다. 꿈과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심한 농사를 지어야 할 건지 말 건지, 이 부엌궁둥이에 와서 젊은 인생의 전말顚末을 화두話頭로 잡고 고뇌하면서 응결된 가슴이 열렸다.

  부엌궁둥이는 주로 장가들기 전에 많이 이용했다. 장가들고는 내 혼자 부엌궁둥이 바람벽에 기대서면 왠지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부 일신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나 속상한데 같이 부엌궁둥이에 기대러 가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새색시와 함께 할 수 없는 새신랑의 고민도 있게 마련이다. 어느 날 저녁별이 뜰 때 혼자 부엌궁둥이의 바람벽에 기대서 있는데 아내가 어떻게 알고 부엌궁둥이로 돌아왔다. 비밀스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아내는 만삭이었다. 어깨로 숨을 쉬며 내 곁에 서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별에 눈을 맞추고 서 있었다. 다행히 여기 혼자 와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아내는 묻지 않았다. 궁금한 점을 언급하지 않은 아내의 참을성은 또 얼마나 고독한 것이었을까. 농사꾼이 되겠다던 꿈을 접고 집을 떠났다. 혼자 객지생활을 했다. 전도가 불투명한 삶의 진척進陟에 겨워 겨울 도시의 거리 모퉁이를 돌아들면 고향집의 온종일 겨울 햇살에 달아 있을 부엌궁둥이가 그리웠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네 식구가 어린애를 낳았다고 하시며 사람이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고 걱정하셨다. 저녁상을 들여놓고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바람벽에 기대 서 있는 네 아내 꼴 보기 싫으니, 데려가든지 형편이 안되면 집으로 내려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부엌궁둥이에 돌아가서 별을 보고 서 있을 갓난아기 업은 아내와 그 아기의 별 같은 눈망울 때문에 객지에서 나는 허둥지둥 힘겨운 분발을 했다.

  그 부엌궁둥이를 아내에게 물려주고 집을 떠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집안에 새댁의 심신을 은닉할 장소가 한 군데쯤은 있어야 시집살이의 중압감을 내려놓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소싯적에 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서서 침전된 삶의 노폐물을 자정自淨해 보셨을까? 아버지는 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서 보지도 못하셨을 것 같다. 그 점이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