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자세 / 장석주 기다림의 자세 ―연남동 1 장석주 구름 몇 장을 서녘 하늘에 내다 널고 기다림의 가장 안쪽에 머무는 날들은 편안했지요. 헐거워진 문의 경첩들을 돌보는 일에 생각이 미칠 때, 어제오늘 연남동은 가냘프고 심심했습니다. 십일월 아침 소택지의 여뀌들 염려하던 당신이 떠났습니다. 무서.. 시 - 필사 2017.05.30
이국의 호텔 이국의 호텔 허수경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 시 - 필사 2017.02.19
어떤 일의 순서 / 임창아 어떤 일의 순서 -임창아 남해에서 여고 다닐 때 우리 집 수소 교미 한 번 붙인 돈은 자취하던 내 한 달 생활비였다 덤으로 나는 남녀관계와 성교육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눈 뜨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귀하신 수컷은 제법 비싸게 놀 줄 알았다 암컷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공연히 꼬.. 시 - 필사 2017.02.14
거위 / 문정희 거위 문정희 나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 오는 텔레비젼에 나온 나를 보고 왝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 시 - 필사 2016.12.23
겨울밤 / 황인숙 겨울밤 황인숙 나는 제 방에 음악을 불어넣는 늦봄의 바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은 얼음 알갱이의 눈보라로 네 방을 질척질척 얼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내가 춥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황폐함 피로, 암울 막막, 사납게 추위가 삶을 얼려 비트는 황폐함 그러면서도 질기게.. 시 - 필사 2016.12.23
오래된 연애 / 장석주 오래된 연애 장석주 가을의 끝이다 열 몇 개의 파탄이 지나간다 양파를 썰자 눈물이 났다 개수대 아래로 물이 조용히 흘러들어갔다 당신이 떠나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장롱 밑에서 죽은 거북이 나왔다 우리는 살면서 잦은 불행에 무뎌졌다 나는 접시를 깼다 실수였다 앞니가 깨졌다 분별.. 시 - 필사 2016.12.18
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의 존재 ​김행숙 ​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 시 - 필사 2016.12.15
국물 / 신달자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 시 - 필사 2016.12.15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김민정 자정 넘어 종로 <금강제화> 맞은편 가판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인형을 골라주고 있다. 여자가 가리킨 건 제 키와 엇비슷한 특대 사이즈의 흰곰이다. 자기 없인 하루도 못 자니까 자기 없을땐 밤마다 얘를 껴안고 잘래. 아줌마가 총채로.. 시 - 필사 2016.11.18
강 / 문정희 강 문정희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고 울고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햝던 짐승의 혀가 사라진 자리 냉기가 오소소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 시 - 필사 201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