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이국의 호텔

칠부능선 2017. 2. 19. 14:22

 

이국의 호텔

허수경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드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 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심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겨지는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하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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