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거위 / 문정희

칠부능선 2016. 12. 23. 17:22

거위

문정희

 

나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

오는 텔레비젼에 나온 나를 보고

왝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

 

- 시집 『지금 장미를 따라』

 

 

 

'시 -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국의 호텔  (0) 2017.02.19
어떤 일의 순서 / 임창아  (0) 2017.02.14
겨울밤 / 황인숙  (0) 2016.12.23
오래된 연애 / 장석주  (0) 2016.12.18
유리의 존재 / 김행숙  (0) 201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