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자세
―연남동 1
장석주
구름 몇 장을 서녘 하늘에 내다 널고 기다림의 가장 안쪽에 머무는 날들은 편안했지요. 헐거워진 문의 경첩들을 돌보는 일에 생각이 미칠 때, 어제오늘 연남동은 가냘프고 심심했습니다. 십일월 아침 소택지의 여뀌들 염려하던 당신이 떠났습니다. 무서리가 내리고, 가을 끝에 방치된 물웅덩이들이 감정에 미친 영향을 따져봤어요. 슬픔의 덜미에 난 깃털을 가지런하게 가다듬는 동안 어느덧 눈과 서리의 날들이 닥치겠지요. 큰 내와 작은 내에 살얼음이 끼는 새벽들, 우리의 연애가 더 견고해졌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여름 이후 빵을 끊었어요. 금식은 기쁨의 일부로 수용되었죠. 아직 우리의 슬픔이 얕았으므로 아령 운동을 오백 회로 늘려 팔뚝 근육을 키우고 승모근을 키울 때 불행과 검은 염소의 몸피가 커지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조간신문을 끊자 연남의 정치 생활은 저녁 여덟시 뉴스로 차고 넘치며 풍성해졌죠. 아침에는 공복 상태로 당 수치와 콜레스테롤 수치를 재서 적고, 저녁나절에는 직립 자세를 허물고 먼 곳을 바라봤습니다.
아침에 도를 듣지 못했음으로 꽃잎들은 속절없이 떨어졌습니다. 공평한 아침들이 돌아와도 배변 습관은 바뀌지 않아요. 당신 눈이 반쯤 감기며 물고기처럼 웃을 때 미묘하게 바뀌는 눈썹의 각도, 괄약근에 몰리는 피의 양들, 이것들이 내 자세를 규정합니다. 볕 좋은 날을 골라 이불을 내다 말리는 연남동 생활을 이제라도 가꿔 볼까요. 여름비 오는 오후에는 낮술에라도 취해 새 연애를 시작한 예전 애인들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요.
연애를 시작한 곳은
연애를 끝내야 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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