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 김남조 시계 김남조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 시 - 필사 2017.09.19
연꽃양로원 / 강정숙 연꽃양로원 강정숙 꽃 지는 장능리 보은당 연밭엔요 홍련, 백련,어리연, 혹주머니를 삭이지 못한 부레옥잠도 있는데요 꽃낯선 냄새를 향해 모가지가 쏠리는 몽구스처럼 꽃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쏠리는데요 챙챙 감겨오는 햇살에도 찐득한 어둑을 이고 있는데요 꾸그러진 씨방을 말리는.. 시 - 필사 2017.09.18
사람의 일 / 천양희 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시 - 필사 2017.09.18
도라지꽃 연정 / 송찬호 도라지꽃 연정 송찬호 나는 이제 좁쌀보다도 작은 백도라지씨를 더는 미운 마음으로 가려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래도 사방이 온통 보랏빛인 청도라지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반달을 툭 분질러 깨문 것같이,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도 모른.. 시 - 필사 2017.08.30
남편 / 문정희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 시 - 필사 2017.08.30
빗방울, 빗방울들 / 나희덕 빗방울, 빗방울들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 시 - 필사 2017.08.30
파랑의 형식 / 한이나 파랑의 형식 한이나 파랑은 바닷가에 두고온 사랑의 형식이다 울트마린에 0.1프로의 기쁨을 섞으면 가장 밝은 파랑이 되고 99.9프로의 우울을 섞으면 가장 어둔 파랑이 되었다 나는 해변의 길 잃은 구름 진한 슬픔 청색시대였다가 파랑을 찾아 꿈속까지 뒤지는 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 시 - 필사 2017.08.18
사막 / 박현웅 사막 박현웅 ​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 시 - 필사 2017.08.18
그래도 날고 싶다 / 이상국 그래도 날고 싶다 이상국 노랑부리저어새는 저 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날아가 여 름을 나고 개똥지빠귀는 손바닥만 한 날개에 몸뚱이를 달 고 시베리아를 떠나 겨울 주남저수지에 온다고 한다 나는 철 따라 옷만 갈아입고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산다 벽돌로 지은 집이 있고 어쩌다 다리.. 시 - 필사 2017.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