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 김이듬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김이듬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췄다 수상작에 대한 논란은 애초부터 없었고 술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 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 시 - 필사 2019.11.09
상강霜降 무렵 / 이상국 상강霜降 무렵 이상국 누군가는 길어도 마흔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게 좋을 것 같다*지만 나는 이미 거기를 지나온 지 오래 이웃집에 그늘이 든다 하여 기르던 오동을 베어내고 그 그늘에서 봉황을 기다리던 가을 살려고만 하면 누가 못 살겠는가 나는 나에게 좀더 다정할 수도 있었으나 기.. 시 - 필사 2019.11.09
산다는 것 / 이생진 산다는 것 이생진 살다보면 죽고 싶고 죽고 싶은데 살아 있는 것 참 따분하지만 그게 사는 거라고 후에서 알고는 빙그레 웃는 얼굴 이렇게 사는 것 포기하고 어디 가서 실컷 잠이나 자고 싶어도 저것들 때문에 하고 가리키는 주름진 손가락 그것이 산거다 살기 싫어 떠나는 사람아 어디로.. 시 - 필사 2019.10.25
가재를 살려야 한다 / 윤일균 가재를 살려야 한다 윤일균 뉴스는 말한다 기찻길 옆 작은 도랑에 가재가 산다 서울에, 군자교 아래 중량천은 버들치 알 까고 청계천은 연어가 산란하러 떼 지어 온다는 말이어서 차마, 믿을 수 없는데 年年이 가재를 본 역무원 손이 간 곳에 가재들의 도량은 연연하다 노량한 앞걸음 비.. 시 - 필사 2019.09.30
시,시, 비,비 / 김민정 시,시,비,비 김민정 사랑해라고 고백하기에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보다 더 화끈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너무좋아 뒤로 자빠지라는 얘기였는데 그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면서 그 흔한 줄행랑에 바쁘셨다 내 탓이냐 네 탓이냐 서로 손가락질하는 기쁨이었다지만 우리 사랑.. 시 - 필사 2019.05.10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그 남자는 말했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시 - 필사 2019.05.10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 시 - 필사 2019.05.10
알리바이 레시피 / 류명순 알리바이 레시피 류명순 주제로는 삼각관계, 의심 반 심증 반 내 연애사를 계량컵에 부어본다 유통기한을 철저히 지키는 그녀가 내 솜씨에 의문을 제기한다 매콤함과 신선도를 함유한 나의 일편단심에 의심을 품었다 입맛을 자극하는 매운맛을 보여주기 위해 우선 잘 정리한 의혹을 다.. 시 - 필사 2019.04.06
그늘에 관한 노트 / 허만하 그늘에 관한 노트 허만하 1 그늘은 밤새 바닷물에 감은 불꽃 머리칼을 흔들며 수평선을 차고 솟아오른 에너지로 하늘을 회전하는 태양이 아득히 먼 지구를 조준하여 던지는 엷고도 엷은 평면이다. 그늘의 바탕인 지구 자신의 그늘은 기하학적으로 있지만 그것을 본 시선이 없다. 지구의 .. 시 - 필사 2019.04.06
스며드는 것 / 안도현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 시 - 필사 2019.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