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그늘에 관한 노트 / 허만하

칠부능선 2019. 4. 6. 12:02

 

그늘에 관한 노트

허만하

 

1

그늘은 밤새 바닷물에 감은 불꽃 머리칼을 흔들며 수평선을 차고 솟아오른 에너지로

하늘을 회전하는 태양이 아득히 먼 지구를 조준하여 던지는 엷고도 엷은 평면이다.

그늘의 바탕인 지구 자신의 그늘은 기하학적으로 있지만 그것을 본 시선이 없다.

지구의 그늘은 좌표로 잡을 수 없는 비어 있는 넓이 어디쯤에서 황홀하게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 시대가 아니고, 우리들도 아니다. 한정 없는 넗이 안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감각과 인식이다. 감각과 언어다.

 

2

그늘에는 내장이 없다. 그늘은 오직 엷다. 엷음의 극한을 초월한 엷음에는 무게가 없다.

그늘은 면적이다. 면적에는 두께가 없다. 그늘은 지도처럼 장소에 집착한다.

그늘은 높낮이가 없는 뚜렷한 윤곽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늘은 모든 색채를 섞으면

생기는 희박한 잿빛이다.

내가 내 육체를 가지듯 나는 내 그늘을 가진다. 내 그늘은 나에게 밀착한다. 그늘은 스스로

먼저 움직이기를 체념한 슬픈 운명이다. 내가 일어서면 그늘은 자동기계처럼 면적을

조절하면서 따라 움직인다. 눈부신 불꽃 덩어리가 하늘 가운데에 자리하는 정오가 되어

내 발바닥에 밟힐 때까지 그늘은 자신의 축척에 따라 넓이를 줄인다.

 

3

그늘은 부피가 없는 물상으로, 자신의 뿌리인 태양의 직사광선을 실천적으로 거부하는 쓸쓸한 저항이다.

우리들 내부를 싱싱한 하나의 계절이 지난다. 새로운 계절과의 만남을 틈타,

5월의 가로수 잎새에서, 먼 바다 표면에서 미래를 예감한 그늘은 추억의 경계를 드러내며

겨울 하늘 별빛처럼 가늘게 떨며 반짝인다. 세계는 조금 느슨하고 지나치게 넓고 선선하다.

내 시선은 어둠의 넓이 바깥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눈빛으로,

비어 있는 세계와 나를 잇는 내 육체의 펄떡이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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