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지다 / 오봉옥 나를 만지다 오봉옥 어둑발 내리고 또 혼자 남아 내 몸을 가만히 만져보네. 얼마 만인가. 내가 내 몸을 만져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래,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지. 기를칠 한번 없이 돌리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이제와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한들 무슨 소용이 .. 시 - 필사 2015.11.16
섯 / 오봉옥 섯 오봉옥 우리를 숨죽이게 한 건 3․8선이 아니었다 검문하러 올라온 총 든 군인도 검게 탄 초병들의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었다 기찻길 건널목에 붉은 글씨로 써놓은 말 섯! 그 말이 급한 우리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두 다리로 짱짱히 버티고 서 고함을 지르는 섯, 그 뒤엔 회초리.. 시 - 필사 2015.11.16
가차 없이 아름답다 / 김주대 가차 없이 아름답다 김주대 빗방울 하나가 차 앞유리에 와서 몸을 내려놓고 속도를 마감한다 심장을 유리에 대고 납작하게 떨다가 충격에서 벗어난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목탁 같은 눈망울로 차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어떠한 사족蛇足도 없이 미끄러져, 문득 사라진다 시 - 필사 2015.10.18
2013년 / 최문자 2013년 최문자 봄 폐를 잘라내고 너무 아파서 누구 이름을 부를 뻔했다. 울지 마 울지마, 괜찮아 괜찮아, 하고 보내주는 문자를 기다렸다. 종점 같은 데서 기침은 피가 잔뜩 묻어야 쏟아지고 주기도문을 열세 번 쯤 외우다가 뒷 문장을 고쳤다 다만 다만, 그 다음을 고쳤다 수없이 한 번도 말.. 시 - 필사 2015.10.18
성性 / 김수영 성性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게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아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 시 - 필사 2015.09.25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 시 - 필사 2015.09.25
멸치 / 김태정 멸치 김태정(1963~2011)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 시 - 필사 2015.09.10
김태정 / 김사인 김태정 -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할 사람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시 - 필사 2015.09.10
에이 시브럴 / 김사인 에이 시브럴 김사인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은 저물고 .. 시 - 필사 2015.09.04
빈집 / 김사인 빈집 김사인 문 앞에서 그대를 부르네. 떨리는 목소리로 그대 이름 부르네 나 혼자의 귀에는 너무 큰 소리 대답은 없지 물론. 닫힌 문을 걷어차네. 대답없자 비로소 큰 소리로 욕하네 개년이라고. 빈집일 때만 나는 마음껏 오지. 차가운 문에 기대앉아 느끼지. 계단을 오르는 그대 발소리 .. 시 - 필사 201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