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는 나의 힘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 시 - 필사 2014.07.31
이재무 / 권순진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이재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이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 시 - 필사 2014.07.24
산자야 누님 / 이원규 산자야 누님 이원규 인도의 스승 스와미 데바난다가 말했다 "산자야! 나의 어린 양, 그대 이름은 산자야니라 그대는 별과 함께 와 바람으로 자유로우리라" 만나자 마자 갈퀴손으로 정수리를 덮으며 단 한 번 불러준 그 이름 그녀의 손금이 바뀌고 맨발의 지도가 그려졌다 용인수도원의 사.. 시 - 필사 2014.03.11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묻지 마라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오걔석 한 조각 부둥켜 안고 산다 가끔 웃으.. 시 - 필사 2014.02.13
가장 / 이정록 가장 이정록 높은 데다 꾸역꾸역 몸 놀려놓지 마라. 뭐든 잡아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놈하고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흘깃거리는 것들이나 꼭대기 좋아하는 것여. 상록회장에 이장만 안 했어도 십 년은 더 사셨을 거다. 대통령한테 마을 밤나무단지 하사금 타내려다 시비가 붙어 코뼈가 가.. 시 - 필사 2014.01.12
삐딱구두 / 이정록 삐딱구두 이정록 뭔 일 저질렀나? 늦기는 해도 외박은 없던 양반인데 말이여. 일이 손에 안 잡혀. 물동이를 이어도 똬리가 쪽머리에 걸치고 고추 순을 집어도 가지째 꺾어대야. 아니나 다를까 저물녘에 개똥참외처럼 노란 택시 한 대가 독 오른 복어처럼 들이치더구나. 반가운 마음하고 .. 시 - 필사 2014.01.12
손가락 염주 / 공광규 손가락 염주 공광규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 내가 모르.. 시 - 필사 2014.01.12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 시 - 필사 2014.01.12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 시 - 필사 2013.10.24
형상학적 시 레시피 / 이가을 형상학적 시 레시피 이가을 1. 글자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포획물, 처음엔 암호같은 기호였다 그녀의 요리는 매번 다른 글자의 맛, 고감도 혀로 맛을 읽어라 그녀는 글자요리 전문가 잘 비빔된 글자들 암호같은 글자를 해독하기 위해 맛보고 만지고 읽다가 중독되었다 시를 요리하는 여자,.. 시 - 필사 201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