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칠부능선 2014. 2. 13. 15:05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묻지 마라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오걔석 한 조각

부둥켜 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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