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칠부능선 2016. 11. 18. 13:34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김민정

 

 

  자정 넘어 종로 <금강제화> 맞은편 가판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인형을 골라주고 있다. 여자가 가리킨 건

제 키와 엇비슷한 특대 사이즈의 흰곰이다. 자기 없인 하루도 못 자니까 자기 없을땐 밤마다 얘를 껴안고 잘래.

아줌마가 총채로 비닐에 싸인 흰곰을 탈탈 턴다. 여자는 양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낀다. 아줌마가 마른걸레로

비닐에 싸인 흰곰을 싹싹 닦는다. 새 물건 없어요? 흰곰이 먼지 뒤집어써서 은곰 됐잖아요. 아줌마가 옆 가판으로

가 특대 사이즈의 흰곰을 하나 빌려서는 다 큰 아이 업듯 등에 지고 온다. 그 사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버린다. 신호등의 녹색 불이 깜빡거렸으므로, 그들에게는 사실 쏜살같이 달려가는 게 맞는 일이므로...

.. 아 이 씨발 연놈들아! 개쌍 연놈들아! 언젠가 태극기 파는 아줌마에게 함에 든 태극기 한번 꺼내봐달라고 했을 때

살 것처럼 흥정하고는 비싸다며 쌩까버렸을 때 이걸 그냥 확! 주먹 쥔 손으로 엿 먹이는 포즈를 나도 한 방 먹어본

적이 있어서 좀 아는데 치욕은 역사책만의 고유명사는 아닌 게 분명하고 여기까지 읽고도 누가 더 밉상인지

분간할 줄 모른다면 있지. 그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라고 봐.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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