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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감자 / 배경희

녹색 감자 배경희 감자는 죄가 있어 햇빛을 싫어하니 망치와 TV가 브로콜리 잘라내듯 칼날은 그 식물들을 쉽게 쳐 내려간다 의심과 거짓말을 일삼는 신문들은 흰색은 그냥 싫어 이유 없는 이유야 모든 귀 막아버리고 검은 죄를 생산하고 다 털고 털어봐 우리는 감자를 믿어 기억하니 때때로 칼날 꽉 문 단단한 무를 햇빛 든 녹색 감자의 혁명이 두려울 거야 『시조미학』(2021,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

말랑말랑한 그늘 / 박희정

말랑말랑한 그늘 박희정 한여름 볕살들이 드러누운 대서大暑 무렵 내 오랜 그리움이 말랑말랑 겹쳐와 서운암 낮은 길목에 사뿐 내려 앉는다 눈길 머문 야생화와 고분한 물길 사이 바람처럼 맴도는 기억, 숨바꼭질하려는지 까무룩, 그림자 길어지고 너는 멀어지고 쟁쟁한 잔돌들과 종요로운 풍경들과 오랜 향기 꼭꼭 채운 장독대 언저리마다 우련히 깃드는 그늘, 너는 술래가 된다 《시조미학》 2021년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

저녁의 두부 / 서숙희

저녁의 두부 서숙희 두부를 만지는 두부 같은 저녁은 적당하게 무르고 적당하게 단단하다 꾹 다문, 입이 몸이고 몸이 입인 흰 은유 으깨져 닫혀버린 축축한 기억들 경계도 격정도 고요히 순장되어 창백한 무덤으로 앉은 한 덩이 직육면체 잔뼈처럼 가지런한 알전구 불빛 아래 표정 없이 저무는 식물성 적막 속으로 수척한 자폐의 저녁이 허기처럼 고인다 -《시조21 》2021년 겨울호

시 - 필사 2022.02.14

그 이불을 덮고 / 나희덕

그 이불을 덮고 나희덕 노고단 올라가는 양지녘 바람이 불러 모은 마른 영혼들 졸참나무잎서어나무잎낙엽송잎당단풍잎 느티나무잎팽나무잎산벗나무잎너도밤나무잎 그 이불을 덮고 한겨울 어린 풀들이 한 열흘은 더 살다 간다 화엄사 뒷산 날개도 채 굳지 않은 날벌레들 벌써 눈뜨고 날아오겠다 그 속에 발 녹인 나도 여기서 한 닷새는 더 걸을 수 있겠다

시 - 필사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