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550

나, 중심

어르신이 전화를 했다. 얼굴 보여야 할 행사에 얼굴을 못 봤다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외할머니가 되느라 그랬다니까 한~참 설교를 하신다. 사랑에 절제가 필요하며, 특히 자식에 대해서 맹목적인 우리나라 여자들이 경계해야할 것이 자식사랑에 대한 절제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몇 달 외국에 다녀올 것이라며 다녀와서 만나자고. 해줄 말씀이 많으시단다. 할머니 노릇때문에 이 한 달, 내 생활이 엉망이 된 건 사실이다. 더우기 연말이라 꼭 참석해야할 행사가 많았다. 딸은 놀이방이나 도우미를 불러놓고 나가라고 했지만 모두 포기했다. 나 없이도 행사는 잘 치루어졌지만, 우리 집에서는 지금 내 충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이렇게 내 노동력을 확실하게 필요로 하는 시간이 앞으로 많지는..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 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서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

놀자, 책이랑 2009.12.16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의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일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것은 ‘내면의 일기’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외면일기’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보기로 한다. ……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 중에서 * 매년 1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그의 동부, 호이젠슈탐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에서 기이한 축제가 ..

놀자, 책이랑 200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