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에서

슬픈 러시아

칠부능선 2006. 6. 8. 15:00
 

  오늘, 그 제국은

 

 

    비오는 노천 카페에서 마신 맥주의 맛은 느린 필름으로 돌아가는 풍경화 같다.  여러 종류의 맥주가 있는데 내가 고른 것은 우리 나라와 비슷한 순한 맛이다.  이곳은 맥주 값이 생수보다 싸다.  예전에는 거리의 자판기에서도 보드카를 팔았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파괴되는 가정이 많이 생겨서 이제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만 술을 판다고 한다.  연간 보드카 소비량이 1인당 60병이라니 쉽게 짐작이 간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독한 보드카로 속을 데우지만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기에는 부족한가 보다.

 

    뿔꼬보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모퉁이에 엉성한 닭장 같은 곳에 수박 몇 십 개를 놓고 파는 사람이 있다.  지나가는 차들이 간간이 수박을 사가기는 한다.  작은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며 신문이나 잡지가 아닌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나 버스의 기사도 책을 읽고 있다.  자연스러운 그들의 모습이 러시아의 거대한 뿌리가 아닌가 한다. 

 

    가이드로 나온 고골을 전공한다는 문학대학 유학생이 이들의 문호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보면 너무도 부럽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적 자긍심은 도도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공산국가의 장점은 문맹이 없는 것이다.  문화 대국의 모습은 웅장하고, 주린 배를 우아하게 채우지 못하는 굳은 표정에서는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문화의 저력을 곳곳에서 느끼면서, 나는 기가 조금 죽었다.

 

   1861년 알렉산더 1세는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를 읽고 농노를 해방시켰다고 한다.  주어진 삶에 충실한 지혜로운 농노의 모습은 황제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전까지 귀족에게 농노는 인간의 개념이 아닌 재산에 불과했던 것이다.  개혁을 주도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이곳에서의 문학, 푸시킨이 러시아의 전부라며 문인이 존경받는 나라, 문학이 제 값을 하는 나라다.

   길가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정원에서 꺾어온 듯한 꽃 몇 송이를 양동이에 놓고 판다.  일조량이 적어 꽃이 귀하지만 즐길 줄 아는 모습이다.  공항에서 한 청년이 화려한 조화 같은 꽃을 셀로판지에 물까지 담아서 소중하게 들고 들어오던 모습을 보았다.  포장이 엉성해 보인 것은 내 눈이 그 동안 과대포장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귀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지혜다.

   이 곳 사람들은 볼쇼이발레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몇 끼의 식사는 건너 뛸 수도 있기에 마을마다 있는 공연장에는 일년 내내 공연이 이어진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공연장과 미술관 앞에 늘어선 줄은 줄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몇 끼의 식사보다 더 오래 남을 질 높은 포만감을 체득했다.  허기를 이기는 도구도 이곳에서는 예술이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10년 동안 변한 것이 무엇일까.

 부드러운 표정을 짓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소비에트제국의 영광의 흔적은 곳곳에 산재하고 봇물처럼 밀려온 서구사회의 모습이 겹쳐 어지럽지만 아직은 배부르지 않은, 아직은 안락하지 않은 이들의 ‘과도기’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 냉담한 표정에서 짐작할 수가 없다.

   사회를 바꾸는 힘이 무엇인가.  지금 이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의식의 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반세기 더 전에 중국에서 노신(魯迅)이 실패한 문학으로서의 민중의 의식개혁을 여기서는 무엇으로 해야할까.

 

  가까이 볼 수 없었던 카레이스키들, 볼쇼이의 진주라는 러시아 제 1의 메조소프라노 루드밀라 남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메이고, 카자흐스탄 출신의 작가 아나톨리 김의 뿌리에 대한 향수에 가슴이 저렸는데… .  의문사한 전설적 록가수, 자유와 저항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빅토르 최의 흔적을 찾아보지 못하고,  눈 덮인 대 설원을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며 며칠이고 달려보지도 못했다.

 

  아쉬움 없는 여행이 있을까.  할 일을 남겨 두고 떠나오는 것도 좋다. 

  촛불을 상징한다는 많은 궁과 성당의 뾰족탑,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촛불의 의미를 알까.  가까이 갈 수 없는 금빛 장식에 눈이 부시다.

  웅장한 문화만 있고 풍요가 없는, 건물만 있고 사람이 없는 유예된 영광의 거대한 러시아,  지금은 슬픈 러시아다. 

 

 

 



Филипп Киркоров - 14 Ты поверишь

 

 


상트 페테르브르그 네바강 건너에서 본 에미리따쥬 미술관 - 교과서에서 보던 명화가 다 있다. 한달 이상 관람을 해야 한다는 곳...

 


강변에서 바라본 교도소

 


해질녘 모스크바
 

 

 

 


모스크바 호텔 앞 광장에서 이른 아침에.

그가 나 인듯, 내가 그 인듯한 친구. 때론 언니같은, 혹은 엄마같은...

내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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