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으로는 20집, 평론집, 창작서 등을 합해 84권째 책이다.
내 스승인 운정 선생님의 50년 수필 사랑이 지극한 마음과 새로운 수필을 추구하는 외침이라면
눈재 선생님의 40년 수필 사랑은 열혈 실천형이다. 끊임없이 읽고, 연구하고, 비평하며, 창작한다.
隨生隨死의 삶, 마지막까지 수필의 현역이고 싶은 바람이 같은데 운정 선생님은 지금 누워계신다.
운정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재 선생님을 바라보니 송구스럽다.
수필을 허투루 쓴 적도, 가볍게 생각한 적도 없는데 ... .
눈재 선생님의 몰랐던 면모를 본다. 노나라 때에 훌륭한 목수 '재경'을 떠올리게 하는 목수 아버지, 평교사로 퇴직한 천생 교육자로서 꼿꼿한 성정, 80년도 가톨릭 한국성인 《103위 성인전》 전 5권과 여러 성인전을 집필했다는 것으로 신실함을, 아름답다고 구경갔던 공세리 성당이 유아세례를 받은 놀이터였다니, 부럽고도 반갑다. 코로나19 때에 여동생이 떠났다. 황당한 이별의 애련이 가슴에 남아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헐렁해진 내 정신을 재촉한다. 아, 이 불편한 각성을 어쩌나.
자주 정신을 깨우기 위해 망치가 될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여둔다.
눈재 - '눈 쌓인 언덕' 은 세상의 잡스러운 것을 다 덮어준다. 하여 수필의 쓸모에 다가간다.
눈재 선생님의 촘촘한 시간에 눈꽃이 환하기를 빈다.
깊이 고개 숙이며 축하와 경의를 올린다.
*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마음도 머문다. 일상의 작은 정물 하나에도 그들의 대화가 숨어 있고 숨결이 있다. 이를 읽어내는 일이 수필가의 임무이다. 작가는 이럴 때에 가슴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마음을 연다. 주거니 받거니 애정을 쏟아야 일상은 화답한다. 우주의 중심이 나라면, 일상은 내 주변을 맴도는 행성과도 같다. 그들이 있으므로 우주는 존재하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아, 수필이여! 그대에게 화답하고 싶다. 정녕 이것이 신화를 꿈꾸려 하는 것인가. (53쪽)
* 그렇다. 수필문학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함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인간의 위대함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앞서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간파해내야 한다. 그럴 때에 수필은 인간학이 되지 않을까 싶다.
(151쪽)
* 오늘아침 「동아일보」에는 김형석 교수의 컬럼이 발표되었다. 100세를 넘긴 고령임에도 아직 강의와 집필을 쉬지 않고 있다. 그 분의 노익장이 부럽기만 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내게 있어 문학은 삶의 길이었다. 문학이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생명이 붙어 있는 날까지 수필과 함께 할 일이겠다. 수필이여, 나의 수필이여, 네가 있어 나는 행복하였노라. 하여 '절필을 선언하다'란 구호는 내게서는 저만치에 물릴 일이다. (157쪽)
* 언제가 스스로 다짐한 일이 있다. 내 나이와 동수同數의 책을 지어내리라. 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해 왔다. 그래 지금 내 나이를 앞지른 저서들이 곳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책의 위기'라는 거대담론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시대라는 변화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디지로그'라는 신조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붓을 놓는 날은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라 믿었다.
....
나는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사후 내 비문에 "여기, 수필을 위해 산 작가가 잠들다. 그에게 문학이 있어 그의 삶은 행복하였네라." 라고 적어주었으면 싶다.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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