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퍼펙트 데이즈 / 야쿠쇼 코지

칠부능선 2024. 6. 29. 21:06

<페북에서 미루님 글 펌>

한 남자가 있다. 오십대쯤 됐을까.

^ 출근 전

골목을 비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빛이 방으로 스미는 새벽 그는 잠에서 후다닥 깬다. 이부자리를 개고 양치질을 하고 수염을 깨끗하게 다듬고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집은 좁지만 잘 정돈돼 있다. 책과 음악 테이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꽂혀 있다.

하늘을 쳐다보고 씽긋 미소지은 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신다. 작은 밴을 타고 올드팝을 들으며 도로를 달린다. 서서히 도심의 면모들이 드러나며 해가 떠오른다. 그가 목에 걸치는 수건과 운동화가 깨끗한 흰색이다. 그가 이 일을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 출근 후

그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성실히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점심은 가까운 신사의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필름카메라로 햇빛이 비치는 나뭇잎 사진을 찍는다.

^ 퇴근 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단골식당에서 가볍게 저녁을 먹고 단골 술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신 후 귀가한다. 스탠드를 켜고 소설을 읽다 잠든다. 가끔 헌책방에서 책을 사고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찾아오고 빨래방에도 간다.

...

흔히 '소확행'에 대한 무한 찬가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은데 그의 이 일상을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소확행이란 말에는 어쩔 수 없는 소극적 자기만족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의 생활은 그것보다 좀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처럼 보인다. 자발적 선택이란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갑자기 나타난 조카와 조카를 데리러 온 여동생과의 대화에서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오늘도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하고 신사에서 코모래비를 필름카메라로 찍고 올드팝을 들으며 퇴근한다. 화면을 그의 얼굴로 가득 채운다. 벅차서, 이 순간이 충만해서 그는 눈물이 날 것 같다. 미소가 번진다. 충만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순간이면 충분하다. 인생의 코모래비!

그의 이름은 '하야라마'이고 배우는 '쉘 위 댄스'의 주인공이었던 '야쿠쇼 코지'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홍보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홍보의 수준이 가히 예술이다.

- 미루님의 글을 읽고 바로 검색하니 토욜 2시 오리cgv 8관에서 상영한다. 바로 예매하고 오늘 다녀왔다.

중년의 남자 혼자 사는 모습이 이리 정갈할 수가 있을까.

퍼펙트 데이즈 / 야쿠쇼 코지 ... 책의 저자처럼 이 영화는 야쿠쇼 코지의 일인극 같다.

말이 없는 그는, 아니 말할 상대가 없는 그는 음악과 책을 누리고, 어린 식물을 키우고 똑 같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맞는다. 자신의 일을 대하는 자세가 그 사람을 만든다. 도쿄 화장실 청소부로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건실하다. 반복되는 조용한 일상에도 기품이 있다.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는 그의 표정에 온갖 감정이 들어있다. 마지막 장면이 오래 남을 듯,

우리는 왜 단순한 삶을 못견뎌 할까.

어쩐일로 남편이 졸지 않고 잘 봤다고 한다.

오는 길에 오랜만에 '야마다야'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여전히 깔끔하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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