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운명이 손대지 못하는 시간들 / 홍혜랑

칠부능선 2022. 9. 6. 20:02

 

<북인 수필선 3>이다.

페북에서 소식듣고 바로 주문했다.

홍혜랑 선생님은 <The수필> 선정위원을 함께 하며 가까이 보게 되었는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얼마 전 사부님을 먼저 보내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 돌무렵부터 부부가 독일로 유학을 가서 6년간 공부를 하고 왔다. 아이는 조부모와 자라고 초등 1학년이 되면서 부모와 생활했다고 한다. '고국에 떼어놓고 온 어린 것들을 빈 복낭에 담은 채, 척박한 사막을 누비는 캥거루의 생존을 닮아 있었다.' 선생의 이 시절 소회가 저릿하다.

대학시절 학생기자로 전혜린을 만난 이야기가 「운명이 손대지 못하는 시간들」이다. 그가 떠난 후에 남은 이들이 엮은 수필집을 보며 열광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시간 저 편, 쉬이 닿은 수 없는 것에 대한 매혹이었다.

묵직한 내용이 많아서 주르륵 읽히지 않는다. 숙제 삼아 꼭꼭 씹어야 하는 문장들이다.

 

 

* 톨스토이가 50대에 쓴 『참회록』에서 영혼의 환부를 해체했다면, 노년에 발표한 에세이 「첫걸음」 에서는 치유의 비책을 찾아낸 것일까. 절제는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본질 회복으로 가는 대안 없는 구원의 길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능인 식욕에 대한 절제부터 시작했다. 얼핏 형이하의 세계라고 지나쳐버리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형이상의 인간적 성숙에 이를 수 없음을 체험으로 증언한 글이 「첫걸음」 이다.

식욕은 생명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지만, 도살을 전제로 하는 육식을 비판하며 그는 채식생활을 실천했다. 오랜 세월 어떻게 써보일 것인가에 매달렸던 시간들을 통회한 노 작가의 절박한 물음은 점점 어떻게 살 것인가로 옮겨간 것이다. 절제는 그에게 더 이상 인간의 품격과 관계되는 덕목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인간의 실존조건인 것이다. 82세의 고령에 가출을 실행에 옮길 만큼 톨스토이에게 절제의 삶은 중요하고 다급했다. (68쪽)

 

 

* 자기 자신을 만나려면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여행 중 만나는 새로운 세계만이 어제까지의 나를 결별하도록 도와준다. 가족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나는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되짚어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떠날 것 같다.

여행의 축복은 길 위에만 있지 않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옛 것이 새롭다. 집 앞 골목길이 낯설다. 벽에 걸린 그림도 부엌의 식탁도 모두 옛 것이 아니다. 떠나기 전 익숙했던 일상이 베일을 벗는 순간이다. 존재 회복의 경이로움이다. 경박한 여행자로 귀가할망정 떠나고 볼 일이다. (169쪽)

 

 

* 독백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작품창작은 외부와의 소통을 원한다. 공감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소통과 공감의 몸통 속에는 작가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생하다.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원천적 욕망'이다. 예술가의 창작 에너지에 공속된 이 강열한 욕망을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지 자연에 반하는 자기 집착의 탐욕이라고 해야 할 지 자문할 때가 있었다. 이 원형적 욕망을 깊이 통회하는 작가를 만날 때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의문도 재발한다.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가 투병 중에 하루에도 몇 번씩 외우면서 가슴 깊이 뜻을 새겼다는 시가 있다.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다.

"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 살고 싶어라 /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 첩첩 산중에 /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 평생 이대로 /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

두메꽃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던 최인호 작가의 칼럼은 그대로 신앙고백이었다. (236쪽)

 

 

* 강자란 '존엄한 조화'의 주인공을 달리 부르는 이름일 터다.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인과율은 없다. 신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것이 연기법이라고 했다. 로맹 롤랑이 작품의 서문에서 들려준 육성이 긴 여운으로 가슴을 맴돈다. 로맹 올랑도 떠났고 그도 떠났다.

"어느 날이라도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보라. 그날 너희는 죄진 채로 죽지 않으리라." (25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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