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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윤오영

칠부능선 2021. 8. 28. 22:20

독서

윤오영

 

 

 독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우선 인생체험이란 한 면만 예로 생각해보자. 20년의 체험은 40세를 못 따르고 40, 50년의 체험은 70, 80세를 못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莊子)도 소년(少年)은 대년(大年)을 못 따른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이 장수를 한들 몇백 년을 살 것인가. 수백 년 수천 년의 체험은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것이니,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독서가 문제인 것이다.

 책이 너무 많아 일생을 읽어도 부족하다고 걱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을 꼭 한 번 거쳐야 할 필요가 있는 서적이란 50, 60권이면 족하다. 그중에도 다시 추리면 열 손가락을 넘지 아니할 것이다. 박학다식이니 박람강기(博覽强記)니 하여 널리 알고 많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이것이 오히려 글 쓰는 데 지장이 되는 것이다. 잡박한 지식의 무질서한 기억은 우리의 총명을 혼미하게 할 수도 있으니, 글 쓰는 이의 머리는 항상 청신하고 지식의 쓰레기통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학자, 대지식인의 문장에서는 의외로 좋은 수필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억력도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의 어느 책 몇째 페이지 몇째 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고 뚜렷이 기억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대개 창작력이 활발하지 못한 사람에게 많다. 그것은 이미 내 영양소로 소화되지 못한 채, 남의 글대로 암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문제는 독서의 선택이다.

 이 선택은 두 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만인이 공인하는 고전명작이다. 이것은 소설이든, 시든, 희곡이든, 문장이든 일독을 요한다. 그러나 여기 난관이 있다. 우리 나라에는 그런 명작이 없기 때문에 외국문학을 읽게 된다. 원문으로 충분히 감상 소화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번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번역이란 신뢰도가 없다. 그 졸속주의와 상행위를 믿을 수가 없다. 대가의 추천도 신용할 수 없는 딱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또 충실한 번역이라 해도, 역자가 문학인이 아니요 어학자인 경우, 원어의 실력보다도 우리나라 문장의 표현력이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명작은 그 표현의 묘미와 언어의 뉘앙스는 잃었다 해도 그 내용과 구상에서만도 위대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문리에 좀 통하면 원작을 몰라도 오역된 개소나 어색한 데를 짐작하고 상상으로 보충해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니, 이른바 창조적 감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자기로서 감명 깊은 책을 선택해두면 좋다.

 

 다음은 시문(詩文)이다. 이 시문의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을 믿고 귀를 믿지 말 것이다. 아무리 무명인의 글이요, 남이 나쁘다 해도 제 눈에 들면 택한다는 주관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이태백의 <봉황루(鳳凰樓)> 시는 만고의 절창이건만 김성탄(金聖嘆)이 그 첫 구절을 헐뜯었고, <수호지(水滸志)>는 당시 천시되던 글이건만 성탄(聖嘆)이 천하 최고의 글이라고 했다. 이런 용기와 자신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만 자기 개성에 맞고, 자기 정도에 맞는 책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런 글만이 자기의 피와 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주관적 선택이 가능할 것인가. 몇 가지의 기초적인 조건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글을 읽고 나서 이 글이 나에게 어떤 감격을 주었나, 어떤 정서를 안겨주었나, 어떤 새로운 문제를 제기해주었나,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겼나 생각해 봐서 하나도 뚜렷한 것이 없으면 그 글은 읽지 말라. 그것은 저속한 글이거나 무의미한 잡문이다. 그런 글을 많이 읽으면 만화가게 드나드는 초등학교 학생이 공부 못하는 것과 같이 글을 못 쓰게 된다.

 다음은 문장 표현 면에서도 선택의 조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습작을 말할 때 아울러 말하기로 하고 독서의 방법을 말하겠다.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글이거든 몇 번이고 싫도록 읽는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고는 좋은 글을 못 쓴다. 왜냐하면 독서의 첫 단계는 그 글을 따라가려는 노력이요, 둘째 단계는 그 글을 정복하려는 노력이요, 셋째 단계는 그 글을 버리고 앞서가려는 노력인 까닭이다. 그래서 더 높은 글, 또 더 높은 글을 발견하고 애독하고 정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이런 독서법을 모르고, 욕심만 부려서, 여러 가지 글, 새로운 글을 빨리 많이만 읽으려고 든다. 이것은 바둑을 두는 사람이 한 단씩 한 단씩 윗단과 대결해서 실력을 올려 가지 않고, 여러 사람하고 많이만 두는 복덕방 할아버지의 바둑과 같아서 생전 두어야 그 바둑이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의 한문장의 대가로 역사에 전하는 분들을 나는 결코 출중한 천재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노력과 공부로 그만큼이라도 성가(成家)한 분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또 글을 몇 번씩이나 읽었다. 옛 기록에서 참고해 보기로 하자. 개 머루 먹듯 두세 번 읽고 딴 글로 옮기는 요새 사람들과는 엄청난 대조가 될 것이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천 번, 윤결은 <<맹자>>를 천 번, 노수신은 <<논어>>를 2천 번, 임제는 <<중용>>을 8백 번, 최립은 <한서(漢書)> 중에서 <항적전(項籍傳>만 만 독, 유몽인은 유종원의 글 천 독, 그리고 김득신이란 문장가는 원래 둔재(鈍才)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천의 <백이전(伯夷傳)>만 1억 1만 3천 번을 읽고 자기 당호(堂號)를 억만재(億萬齋)라고 했다. <백이전>이란 요새 활자로 하면 한 페이지 정도가 아닐까 한다. 자기가 따라가지 못하는 좋은 글이면 일생을 두고 읽어도 다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독서에는 평안(評眼)이 따라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만고 최고수준의 작품이 아닐진대 그 이유로서 어딘가 결함이나 부족이나 저급한 데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자기의 중대한 발견이요, 실력의 높은 약진이다. 하여간 글을 읽지 않고 글을 쓰려는 것은 밑천 없이 장사하려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