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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로운 시작, 오늘이다

칠부능선 2021. 9. 18. 01:06

리뷰 서평

 

 

날마다 새로운 시작, 오늘이다

노정숙 에세이 피어라, 오늘을 중심으로

 

 

박효진

 

 

 

  수필은 열려있어야 한다. 형식의 자유로움뿐 아니라 일상적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수필이 작가의 직접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문학이라고는 하나, 작가는 사고의 확장으로 보다 유연하게 작품 속을 유영할 수 있어야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영국의 신비주의 시인, 1757~1827)인식의 문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한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윤리나 도덕에 얽매이기보다는 그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나와 만날 때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작가라면 누구나 붓 가는 대로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를 희망한다. 글감을 앞에 두고 공굴리며 관찰하기를 몇날며칠, 드디어 그 날이 붓이 가는 대로 써지는 날인 것이다. 피어라, 오늘은 마치 그런 작품들로 맞춤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을 오랫동안 끼고 살아온 작가가 어느 날 작정하고 앉아 에센스만 뽑아 낸 것 같은 느낌, 그것은 깊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노정숙은 사람이 좋아서 시와 수필 밭에서 함께 놀고 있는 작가라고 말한다. 그녀의 문학적 낯섦과 치열성은 넘보기가 거의 불가능하, “등단하기 전부터 이미 독서로 문학적 내공을 쌓아 올렸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시와 수필 밭을 떠나본 적이 없(박양근,노정숙의 아포리즘, 그 시문화의 미학,현대수필,2014) 준비된 작가로서의 문학에 대한 열의를 호평한다.

  작가는 2000현대수필봄호에 말 한마디로 등단했고, 2012SDU사이버문학상으로 입상해 시작에서 시를 발표한 수필가이다. 문예비평지 의 편집위원, 성남 문예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수필집 흐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한눈팔기,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2013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피어라, 오늘을 출간한 중견 수필가이다.

 

  노정숙의 작품은 수필과 산문시의 중간적 성격을 보인다. 이것은 그가 수필가이며 시인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감성수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시와 수필의 이미지에 대해서 시는 어머니같이 다정하게 대하고, 수필은 아버지처럼 엄하게 대하는 게 제 글쓰기의 자세입니다. 수필에서는 늘 시적 장치를 염두에 두고, 시는 단방에 다가가는 선명한 느낌을 선호합니다. 시는 간혹 재미있고, 수필은 쓸수록 어렵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의 특징은 아포리즘이 가장 두드러진다. 작가도 자신의 글을 아포리즘 에세이라고 정의한다. “소설이 될 만한 생의 내력도 간결하게 뭉치고, 시가 될 절정의 순간도 눙쳤다고 하며, “틀을 벗었기에 가볍고 즐겁게 소통하리라 믿는다(바람, 바람)고 한다. 화소가 다채롭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여행, 정치, 역사, ,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보와 지식도 폭넓다. 서정적 감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문제, 삶에 대한 반성,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노정숙은 내 안에 잠재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작업이 수필세계라고 한다. 수필을 쓸 때는 좋은 사람을 만날 때를 상상하며 수필을 대하, “솔직함을 최선으로 하며, 치장을 최소화한다. “나의 수필이 말한다// 너무 높게 날면 거짓말이 된다// 너무 낮게 날면 세속적이 된다// 높이를 적당히 조절해야 격이 갖추어진다(선 채로 꾸는 꿈)고 수필을 대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피어라, 오늘에서는 수필을 처음 대할 때는 맹렬히 쏟아내는 샘물이었지만 20년 가까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갈증이라고 한다. “두려움과 침잠의 욕구를 가져왔다. 더 진중하게 더 재미있게 써야한다는 강박이 왔다며, “사는 만큼 나오는 것이 수필이라고 한다. 초기 수필관(선 채로 꾸는 꿈)과 비교해보면 많이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성은 미학적 요소의 하나이며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본 세계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구현해낼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다양한 화소나 단락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작가의 개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김종헌,수필비평집읽기,수필미학32).

  《피어라, 오늘은 총6장으로 되어있다. 1장에서는 업적을 알리고 싶은 선조들을 소개하고, 2장은 우리나라와 그리스와 이탈리아 섬들, 러시아, 인도를 다니며 각각의 주제에 따라 정리했다. 3장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관계를 탐구했다. 4장은 애인을 대하듯 수필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한다. 5장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묶었다. 6장은 아포리즘 에세이로 3년 동안 잡지에 연재한 작품을 수록했다.

  “행복은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꽃 닮은 사람은 인생의 계절 어디에서 있든 사랑옵다(피어라, 오늘)라고 말하는 작가. 사람이 좋아서 글을 쓴다는 노정숙의 글을 만나보자.

 

2.

  노정숙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말한다. 삶을 통해 얻은 다양한 체험이 작가의 사유와 더불어 그 의미가 확장되고, 삶의 방식이나 방향 그리고 가능성을 제시한다.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생에 대해 재해석하고, 삶을 이해한다. 노정숙의 에세이집에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오감을 열고 느낄 수 있는 삶,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피어라, 오늘은 독특한 감각적 표현과 작가만의 철학을 모색할 수 있다. 주체가 다양하고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문학 작품은 물론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끌어와 흥미롭게 펼친다.

 

  제1탐색은 선조들의 행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는 그분들의 높은 실천력과 사상에 재미를 더하고자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다고 한다. 먼저, 편지글 형식의 수필을 만날 수 있다. 처사, 남명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성품을 지닌 조식에게, 이옥, 소소한 항명문체반정에 걸려 억압받고 억울한 이옥이 정조임금께, 나는 한 마리 개였다는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 선생에게 사배四拜를 올린 글이다.

또 다른 형식으로 작가의 인터뷰 노먼 베쑨과 만나다가 있다. “(작가) : 좋은 인성을 물려 받으셨네요.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요?// 노먼 베쑨 : 생각과 동시에 몸이 나가는 성질이란 고질병이 있어요. 급한 성질 때문에 낭패본 일이 많죠. 한 여자와 결혼을 두 번 하고, 이혼도 두 번 했지요. 첫 번 이혼은 내가 폐결핵에 걸려서 이혼을 결정했어요.() 수술을 하고 완쾌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청혼을 하고 결혼을 했지요.” 가상 인터뷰임에도 현장감이 느껴지고,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130년 전 의사로 활약했던 노먼 베쑨(1890~1939)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인상을 준다.

  그 외에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대구 현풍의 도동서원을 둘러본 후 쓴 도동서원에서 그를 생각하다가 있고, 작가가 실학의 학맥을 이은 이용휴의 입이 되어 그의 업적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 이용휴가 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사상과 삶을 새로운 형식으로 접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한층 더 신선하게 읽히도록 했다.

 

  제2해방구는 작가가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역사와 인문 지식을 전달한다. “이국의 풍광보다 사람과 이야기에 매혹된 시간을 누렸다는 작가의 말에서 여행수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글을 읽다 보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작가의 사유와 더불어 생동감있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열반지에서작가는 부처의 행적을 찾아 쿠시나가르로 간다. 부처의 득도지인 보드가야를 걸으며 명상한다. “누구도 무엇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등불이니 자신을 믿으라는 부처의 마지막 말에 그는 위안를 얻는다. 번뇌와 고뇌의 해방은 고사하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살아간다는 작가에게 그 말이 꼭 힘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된다.

  산토리니 여행 중 아틀란티스 서점에서 한강의 을 만난다. “하얀색은 우리가 알아내지 못할 정도의 빠른 주기로 생사를 오가는지도 모른다. 생명의 시작인 배내옷, 환희의 순간 웨딩드레스와 생의 마감에 입는 수의까지 인생의 절정은 모두 흰색과 함께 한다며 순백의 이면을 말한다. 순백에 홀리다는 삶과 죽음이 배인 에 대해 생각한다.

  〈푸르고 푸른 몰타중세의 골목은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 이야기이다. 그곳은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받았어도 절경 하나만큼은 자랑할 만하다. “바다는 잉크 빛과 사파이어 빛 사이사이 신비로운 켜를 만들며 일렁인다.() 파도에 깎이고 바람을 받아낸 바위 절벽은 기기묘묘하다며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의 감성을 따라 옛 수도 엠디나의 골목을 둘러본다. 중세시대 그들의 문화와 역사 속으로 들어가 나도 함께 걸어간다.

  노정숙은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을 걷다 바다를 향해 절을 하는 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미의 바람은 할머니의 기도가 당연히 자식을 향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젊은 엄마였던 시간을 돌아본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을 바란다. 그래서 아이들도 자유롭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방목형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의 기준이었을 뿐 아이들이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작가는 모든 어미의 바람은 자식의 행복인데, 아마 자식도 부모의 행복을 바랄 것이라 믿는다. 작품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곳,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슬로시티라는 그곳에서 자연과 한몸이 됨을 느낀다. “풍광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심성은 닮았다. 순한 눈빛의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비로소 풍경이 완성된다. 나는 즐거이 풍경을 포식한다는 작가 함께 나도 그 풍광 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다. 동피랑에 가거든은 통영의 대표 관광지 동피랑 벽화마을을 둘러본다. “동피랑은 벽화 때문에 살아남은 우리 이웃 달동네예요. 종종색색 꿈꾸게 하는 벽화로 환해지는 골목에 복기미가 피어오르기를 빕니다라는 작가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특히 다정한 말투는 독자에게 정감있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아기자기한 동피랑 벽화마을과 잘 어울린다.

 

  제3관계 탐구에서는 작가와 그 환경을 둘러싼 이야기를 엮었다. 작가는 이 장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관계, 바람직한 관계형성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어느 날 무심히화원에서 남천을 데려온다. 남천의 전화위복이라는 꽃말이 재난 중인 이 시대에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전화위복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사람의 몫이라며 남천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려러니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나를 다스릴 때 쓰는 말이다. 작가는 상대를 이해하고 관용을 베푸는 말랑말랑한 노년이 되길 희망한다. ‘그려러니하며 순해지고 싶지만, 부당한 정책이나 관습 앞에서는 그려러니가 되지 않는다. “‘그려러니는 체념과 포기를 너그러움으로 포장하고 있,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신념이 서려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에는 내적으로는 강인해도 외적으로 그려러니하며 살아갈 날을 기다리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이런 작품도 있다. , 여럿이 혼자서는 술이 갖는 의미와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낸다. 작가는 혼술의 원조가 이백이라 생각하는데 이 글에서 그의 흥취가 느껴진다. 작가의 수필에서 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대체로 긍정적이다. 술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좋은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에게 은 한결같이 곁을 내어주는 친구처럼 든든해 보인다.

  작가는 가족 간의 관계를 말할 때 유독 조심스러워 보인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녀가 결합이 되면, 가족을 유지하고 책임지는 일은 서로에게 동등하게 부여된다고 한다. 결혼 진혼곡은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삶을 통해 부부 관계를 되돌아본다. 부부를 지켜주는 것은, 사랑을 넘어선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부는 제각각 흔들리며 같은 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예비 연리지라며 부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제4천년학생은 삶에 대해 학생과 같이 배우는 자세로 썼다고 한다. 다양한 소재를 담은 에피소드는 작가의 수필관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속에 담긴 진솔한 삶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수필은고백록〉 〈샘물이며 갈증〉 〈애인은 작가가 수필을 대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수필을 애인처럼 생각하고, “거저 알게 된 이런 일들과 흙먼지 바람에게 눈길 주고 새 꽃 그대에게 귀를 여는 일, 내 안의 어린 나와 늙은 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수필을 대하는 마음이 도예가가 도자기를 빚는 정성만큼 조심스럽다. 샘물이며 갈증은 수필이 처음 샘물이었다가 지금은 갈증이 되었다고 한다. “() 돌아보면 가슴 벅차고 운치가 오래 남는 좋은 수필이 많다. 형식과 규제가 없기에 자유롭다. 파격적으로 새로워도 좋다. 어떠한 실험도 가능하다. 마음껏 놀기에 이보다 더 좋은 판이 어디 있겠냐.() 잠시 샘물이며 오래 갈증인 그대 곁에서 오늘도 논다. 친절하지 않게, 너무 냉정하지도 않게.작가는 첫 창작법 선 채로 꾸는 꿈에 이어 두 번째 수필작법을 말한다.

  노정숙은 에세이적 정체성이 확실하다. 글을 쓰는데 스스로 자극을 주면서 수필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 나간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할 때마다 재미는 있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채근한다. 끊임없는 퇴고 과정을 거치지만 자신의 글에 한계를 느낀다고 말한다.

  수필의 길이는 짧지만 여운이 강하게 남는 수필도 있다. 육체탐구는 공짜로 받은 육체를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수지맞는 장사라고 하며, 작가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고, 시신기증까지 결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뜻 있는 삶을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내려놓는 마음이 느껴지는 수필은 또 있다. 내 자리 꽃자리에서 작가는사람은 타고난 그릇이 다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내가 극복해야 할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기에 이제는 나에게 너그럽고, 너무 애쓰지 않고 한발 물러서야겠다고 생각한다. 무한 경쟁 속에서 승산없는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제5잡설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가족의 죽음, 유명인사의 죽음, 앞으로 다가올 어떤 죽음에 대해 작가의 고찰이 잘 드러나 있다.

  〈시간의 힘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신인류로 사는 법을 말한다. 작가는 요양원에 계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외롭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아버님의 유산은 외로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신인류로 살아가려면 먼저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슬픈 축제에서 작가는 흰 국화는 너무 근엄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흰색 꽃을 싫어한 어머님을 생각해 영정사진 곁에 여러 색의 장미도 함께 둔다.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마음이 장미꽃 색보다 더 곱고 화사하다. 성질대로 떠난다는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며, 성격과 죽음을 연관 짓는다. 작가는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를 닮은 시아버지의 기질을 볼 때, 우리는 유전자의 내력대로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전자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어떤 기질을 가졌더라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 말한다. 애통하지 않다에서 작가는 길건 짧건 할 일을 다 한 나머지 시간은 잉여시간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너무 이른 죽음도 애통하지 않은 것이다. “호상은 삶의 길이가 아니고 삶의 품위에 달려있으므로 자신은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라 생각한다. 나를 받아주세요에서는 죽음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포르말린에 잠겨 팅팅 불은 나의 몸은 몇 번 더 남은 할 일을 위해 대기할 것입니다. 끝으로 신참 의학도를 맞을 것입니다. 실습실 해부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뼈와 내장이 무사히 해체되고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어, 그들이 펄쳐갈 의로운 일에 쓰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는 작가의 담담한 목소리가 태연하게 느껴진다.

 

  제6아포리즘에서는 표제작 피어라, 오늘을 포함해 계절에 맞춰 쓴 짧은 글이 실렸다. 이 장의 특징은 아포리즘이라는 짧은 산문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수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서 이미 아포리즘 형식의 수필을 소개했고, 그 이전에 바람, 바람한눈팔기라는 아포리즘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번 수필집에는 몇 년간 잡지에 연재되었던 아포리즘 수필을 수록했다. 사계절에 따라 사람 사는 풍경을 담은 내용이다. 봄봄봄, 하하하, 추추추, 동동동, 봄비를 마시자, 여름, 서럽게 운다, 날아라, 생명은 길이가 짧지만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풍부하다. 작가가 아포리즘 에세이를 쓴다라고 한 이유인 것 같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 펼쳐 눈물에 씻는다. 박박 치대고 흔들어 쓴기 독기 빼내고 통곡바람에 보송보송 말리는 저 오체      투지. 매미를 따라 명 짧은 여름 꽃이 흩날린다.

    목 놓아 우는 자는 아름답다.

    - 여름, 서럽게 운다중에서

 

작가는 이미 오랫동안 시를 공부한 영향으로 시와 산문의 경계를 쉽게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춤추는 가을, 질주하는 여름, 겨울 채비같은 수필은 산문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비꽃 든다.

    여린 몸 낱낱이 힘 모아

    한여름 열기를 삭이고 정결한 결기를 품었다.

    씻어내리는 건 비의 본성

    감탕밭에서도 맑은 것을 온몸으로 자아올린다.

    - 질주하는 여름중에서

 

표제작 피어라, 오늘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다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주고 그래도 잃은 건 하나도 없다는 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오늘은, 늘 새롭고 다정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안다, 행복은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꽃 닮은 사람은 인생의 계절 어디에 서 있든 사랑옵다.

    여린 봉오리든 한창 피었든 슬몃 이울어가든, 누구나 오늘이 최고다.

    - 피어라, 오늘중에서

 

 

3.

  몇 년 전부터 에세이가 부쩍 눈에 띄게 늘었다. 일부 작가의 에세이는 출간이 되기 무섭게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가 아직도 내려올 줄 모른다. 나도 호기심에 한 권 뽑아 들었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케이크를 고르듯 맛과 내용물을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 디자인, 책의 무게와 홍보용 카피까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 기분이었다. 내가 집어든 에세이집도 그랬다. 하지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노정숙의 에세이는 반대다. 그의 글은 장식이 요란한 옷이 아니어서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자극이 없는 음식 같아서 먹고 난 다음의 시간을 여유롭게 해준다.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선물하며 희망을 줌으로써 다음 칸으로의 이동을 기대하게 한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도 보고, 바람 부는 창가에 기대기도 하면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노정숙 작가의 작품에서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이었다. 조용한 관찰자의 시선이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 활짝 피어나, 오늘로 완성되길 바라며.

 

 

<인간과문학>2021 가을.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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