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선한 그들 / 노정숙

칠부능선 2021. 6. 30. 19:09

선한 그들

노정숙

 

 

바리톤 정경의 오페라마 우리 가곡 전상서를 보러갔다. 건물 입구에서 열 체크를 하고, 공연장 앞에서는 QR코드 확인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무대라서 설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넓은 공연장에 의자가 스물 남짓이다.

오페라와 드라마를 합성한 오페라마를 만든 정경 교수는 토, , , , , 한국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주제에 맞춰 한국가곡에 깃든 역사의식을 일깨우며 열창했다. 우리 경제를 일으킨 기성세대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지만 역사적 배경까지 알리는 이런 노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공연 끝부분에 관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다. 한 관객이 성악과를 지망하는 고3에게 들려줄 말을 청했다. ‘예술가는 광대로서 남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이 목적이라야 한다. 예술가는 대중에게 선물을 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가 공연을 준비하는 자세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양한 공익활동을 하고 있다.

첫 앨범 정경아리랑으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위로하고, 사회 문제를 알리기 위해 여러 편의 창작곡을 만들었다. 그는 제주의 해녀박물관에서 해녀들이 300회 이상 항일했던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을 보았다. 이에 감동받아서 제주 해녀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바다를 담은 소녀를 만들었다. 해녀복장을 한 무용수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도 공연을 했다. 언젠가는 아프리카에 공연장을 만들어 모든 인종이 한 무대에서 인류애를 노래하는 오페라마 공연을 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공연이 끝나고 산 그의 책 예술상인에는 도도한 자신감이 서려있다. 시대를 거슬러 고려와 조선시대에 관통했던 사농공상을 뒤집어 놓는다. 멀리 있던 클래식을 대중에게 가깝게 끌어왔다. 예술이 팔리지 않는 나라의 국민은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화장지 박스의 겉면에 고흐나 르누아르의 명화를 인쇄하자 매출이 15%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과 상업의 결합은 이처럼 긍정적인 흐름을 가져올 수 있다. 토크 콘서트를 통해 공공선公共善을 지향하는 이 당당한 예술 상인이 미덥다. 코로나 때문에 그동안 모든 공연을 취소, 연기했다. 지난번 유엔 개막 축하공연을 인터넷으로 했다고 한다. 큰 문이 닫히면 창이 열리는 법, 이제 다른 통로를 찾는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년 기념으로 만든 다큐 영화 <부활>을 봤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료 봉사하던 이태석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어린 제자들이 제2의 이태석이 되어 그가 했던 봉사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제자들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어디가 아프세요?’ 묻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손을 먼저 잡는다. 한센인 마을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진료를 한다. 이태석 신부가 해오던 진료 방법 그대로다.

사비를 털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원래 영화 제목은 <우리가 이태석입니다> 이었는데 그 모 습을 보며 제목을 <부활>로 바꿨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는 이것이야말로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배운다. 손을 잡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그래서 한센병 환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이태석 신부를 떠올리며 환하게 웃는다. 오랫동안 시사 고발 전문 피디였던 감독은 이 영화가 가장 강력한 사랑에 관한 고발 영화라고 한다. 우리사회에 진정한 리더십의 방향을 제시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기희생을 담보로 해야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인류애는 전파력이 강하다. 구수환 감독의 나레이션은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영향을 받으면 좋겠다. 재개봉으로 하루에 1회 상연하는데, 넓은 영화관에서 13명이 봤다.

먼저 본 친구가 손수건 준비하라고 했는데, 손수건을 쓸 일보다 목울대가 아파왔다. 눈물은 절로 흐르지만 가슴이 조인다.

 

선한 영향력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참혹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일깨운다. 경기장의 함성과 공연장의 열정,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가 그립다. 홀로 넉넉할 수 있는 힘은 언제든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격리에 익숙해졌지만 불안과 허기가 스멀거린다. 공포는 불안을 먹고 자란다. 이미 나온 재난 영화와 책을 보면서 공포가 인간의지 너머의 힘으로 작용하는 걸 보았다.

세기의 역병 앞에 14세기 흑사병을 떠올리기도 하고, 2050년에는 지구에서의 거주가 불가능하다는 말도 나왔지만 절망할 일은 아니다. 어떤 바이러스든 건강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지 않다. 면역력을 키우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는 것과 증상 없이도 감염되고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저마다의 고통은 극복할 만큼만 주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타고난 명줄만큼 살다 가는 것이라 여긴다면 너무 낙관적인가. 선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널리 퍼지는 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거다.

혼자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줄 알게 되었다. 둥둥 떠밀려 다니던 대규모 행사나 인사치레인 경조사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순서에 따라 백신 접종을 하며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새롭게 선하게.

 

 

  <한국산문> 2021. 7월호 (통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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