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두 어머니 / 노정숙

칠부능선 2021. 9. 3. 15:20

 

두 어머니

노정숙

 

 

  꿈결에도 안 오시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떠난 지 20년이 넘은 엄마는 내 꿈에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왜 엄마는 셋째 오빠와 조카며느리 꿈에 다녀가시면서 나만 외면하는 걸까. 어머니도 큰아들에게는 가끔 다녀가신다는데 내겐 안 오신다. 어머니는 나를 마지막까지 알아보셨는데. 엄마에게도 어머니께도 할 일을 다 해서 아쉬운 게 없다고 여긴 게 괘씸하신 걸까.

  한 시간 거리에 살면서도 엄마한테는 날짜를 정해놓고 한 달에 한 번 찾아뵈었다. 가끔 전화를 하면 반보기는 되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84세 엄마는 기력은 쇠했으나 맑은 정신이었다. 그러다 하루도 앓지 않고 잠자듯 혼수상태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새천년을 엄마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냈음에도 고요했던 엄마는 누구에게도 폐되지 않게 서둘러 가셨다. 나는 친정엄마를 한 번도 목욕시켜드리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집 목욕탕에서 두 번 쓰러지신 후 아기가 되셨지만 끝까지 염치를 놓지는 않으셨다. 목욕 후에 맑은 얼굴로 날아갈 것 같다. 너 때문에 내가 오래 산다.” 하시던 말씀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뿌듯했다. 6년여 그 시간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완전히 거동을 못해 요양원에 가시고 난 후 마음은 더 힘들었다. “자주 오지마라시던 말씀을 들으면서 어머니께도 반어법이 있다는 걸 짐작했으니 참 면구스럽다. 91세 어머니는 검불이 사위듯 순하게 가셨다.

  늦둥이 막내였던 나는 친정엄마의 오지랖 넓은 처사와 굼뜬 행동에 곧잘 투정을 부렸다. 밤에 불을 켜지 않고 화장실에 있는 엄마를 보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불 좀 켜시라고. 전기세를 아끼느라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 나이 되어보니 눈이 부셔서 그런 거다. 엄마는 철없는 내 시시비비에 그래, 너 잘났다하며 지그시 무시하다가 어느 날은 너도 너 같은 딸 낳아라.”고 하셨다. 그런데 딸은 격세유전을 했는지 나보다 외할머니 심성을 닮았다. 곰살맞은 성격에 내가 하는 일에 아직까지는 토를 다는 법이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였던 엄마, 초등학교 때 엄마가 학교에 오면 친구들이 너희 할머니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속으로 젊은 엄마를 부러워했다. 맏이와 결혼을 하니 시어머니는 충분히 젊고 고우셨다. 함께 외출하면 딸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과묵한 어머니는 잔소리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난 그저 그러려니하며 따랐다. 준비 없는 맏며느리는 어머니의 후한 그늘 아래 그냥 묻어갔다.

  엄마와 함께 산 만만한 시간보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 깐깐한 시간이 훨씬 길다. 나는 흐름에 순응하며 천방지축이었던 막내기질보다 어설프지만 맏며느리 꼴에 더 가까워졌다. 겉모양새는 그렇지만 타고난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오래전 <여자의 일생> 가사를 적어두고 연습하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 드러내지 못한 열정과 회한이 느껴진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흥이 날 때 엄마는 <오동동 타령>을 불렀다. 어머니들의 그 애달픈 인고가 가정을 지킨 주춧돌이었다.

  엄마는 사돈인 어머니를 보며 새댁같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엄마에게 바보처럼사신다고 했다. 이 은유와 직설 안에 두 분의 성정이 새겨있다. 자신보다 주위사람들을 위해 돈 쓰는 일이 더 좋던 엄마와 돈을 모으는 게 낙이던 시어머니의 정서는 많이 달랐다. 엄마와 어머니에게 당신을 위해 돈을 쓰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두 분 다 귓등으로 들으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보니 아예 빈손이었고,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은 값지게 쓰지 못했다. 말년에도 어머니는 내게 사과할 일을 만들어 나를 몹시 슬프게 하셨다.

  나는 엄마처럼 품이 넓은 걸 바라지 않고, 어머니같이 성실근면하고 싶지도 않다. 온갖 걱정을 달고 사는 엄마가 답답했고, 자식과 돈에 집착하는 어머니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내 잘난 척으로 두 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오랜 생각의 굳은 틀이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장래희망을 말랑말랑한 노인으로 잡았다.

일찍이 나 자신만 다그치기로 했다. 길게 계획을 세운 일이 없다. 다만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나간다. 오늘을 잘 살아낼 것,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성가 구절을 들으며 눈물이 줄줄 흐르던 시간이 행운이었다. 다시 말씀에 흠씬 취할 수 있게 가슴을 연다.

  요즘 들어 생각하니 엄마와 어머니의 임종을 못 보고도 그저 평안하게 가셨다고 믿는 내 생각도 터무니없다. 마지막 순간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두렵고 무서웠을 그 순간에 손잡아 드리지 못한 게 이제야 가슴이 저려온다. 내 마지막 순간이 먼 일이 아니어서일까. 새삼 돌아보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엄마, 미안해요. 어머니 미안합니다.

엄마와 어머니가 내 꿈에 오시지 않는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늦되고 뒷북치는 건 내 지병이다. 아무래도 난치병이다.

 

 

<계간수필> 2021년 가을호 통권 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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