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이런 모독 / 노정숙

칠부능선 2021. 6. 21. 17:38

 

 

이런 모독

노정숙

 

 

올해가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년이다. 그가 1996년에 티베트와 네팔을 다녀와서 쓴 책을 다시 읽었다. 첫 장에 ‘98.11.6 盧貞淑이라고 쓰여 있다. 그때는 새 책을 사면 이런 표시를 했다. 지금은 가능하면 흔적 없이 본다. 밑줄 치고 싶은 부분엔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필사한다. 깨끗하게 보고 읽을 만한 사람에게 준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나는 티베트, 네팔을 가보지 못해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한참 후 딸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놓고 딸과 함께 인도를 거쳐 네팔을 다녀왔다.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분명 이 여행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이것도 혼수라고 생색을 냈다.

인도를 거쳐서 당도한 네팔의 첫인상은 참으로 순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박완서 선생이 티베트를 돌아 네팔에 왔을 때의 느낌을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고 썼다. 이렇게 여행의 앞과 뒤에 이어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걸 보니 티베트의 순정한 모습이 그려진다.

줄줄이 이어져 있는 사원에서 익숙하게 듣는 진언은 옴마니반메홈으로 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은 식물과 광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의 이름을 입에 달고 있다. 구차한 현실을 극복하는 한편, 아름다움으로 정신을 정화하는 힘을 갈망하는 주문이다. 정신적 주문과 함께 이곳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녀 합환상이 놀랍다. 인간이 육체로 이룰 수 있는 합일의 온갖 자세가 새겨있다. 이것을 보면 정신뿐 아니라 몸의 환락도 중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종족번식이라는 지고의 언명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산간 고원에서 목동은 야크 가죽 텐트를 치고, 야크의 허파로 만든 풍구에 야크 똥 연료를 태우며 산다. 먹이를 구하는 대가로 유익한 것을 주는 야크처럼 그들은 어떤 표정으로도 관광객에게 값싼 호의를 바라지 않는다. 때에 찌들어 갑옷이 된 옷을 입고 머리에 원초적 장식을 하고 야크 뼈와 터키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친 목동은 수줍으나 당당한 수컷스러움이 있다.

우리가 에베레스트라고 부르는 히말라야 최고봉을 여기서는 초모랑마라고 한다. 초모랑마는 최고봉이라는 게 발견되기 전에도 최고봉이었고 이름이 붙여지기 전부터 거기 있었다. 박완서 작가는 에베레스트는 칠성이가 미국 가서 리차드가 된 것 같은 이름이니 본고장에서는 초모랑마라고 불러주는 게 예의일 것 같다고 했지만, 이 작은 일을 실행하는 것도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일이다.

귀기마저 감도는 얌드록초 호수 앞에서 일행의 일갈 - 글로 옮기기 민망한 쌍욕을 들으며 가슴이 후련한 절창이었다니, 차마 옮기지 못한 쌍욕이 무엇이었을까.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 욕이라니, 덩달아 통쾌해지는 심사는 무엇인가.

차트완 국립공원에서 나무들의 약육강식을 바라본다. 밀림에서는 크고 잘생긴 나무들이 강자가 아니라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덩굴나무가 강자다. 남을 칭칭 감고 올라가면서 그 나무가 고사할 때까지 사정없이 진을 빨다가 나무가 말라죽으면 다시 그 옆의 나무로 옮겨간다. 한 덩굴나무가 몇 그루의 거목을 고사시켰는지 그 순서까지 보인다. 세고 우람한 것만이 강자가 아니다. 알 수 없는 또 다른 자연의 법칙이다.

티베트는 중국에 주권을 빼앗기고 달라이 라마가 망명지로 떠돌고 있지만, 이들은 민족의 종교와 역사, 문화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행정상으로 중국의 서장성이지만 우리는 티베트라는 주권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의 독특한 정신문화는 중국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복할 수 없다. 그들은 자연에서 신의 경외를 느끼고,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겸양한 삶을 이어간다.

티베트를 식민지로 두고 있는 중국인들의 행태에서 박완서 작가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그때의 분노가 겹쳐진다. 중국인 식당 주인이 여행객이 남긴 음식을 개밥처럼 한꺼번에 쓸어 담아 문 앞의 걸인에게 주는 모습을 보며 참담해진다.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여기저기 뒹구는 비닐과 스티로폼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들을 보며 말한다.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

여행기의 제목이 모독이라는 것에 심장이 찌릿하며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다. 하물며 거기서 뭘 얻고자 한 나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그들의 척박한 삶을 바라보며, 상대적 풍요에 안도하고 딸이 잘 살아내길 주문까지 한 속내가 드러난 듯 낯이 뜨겁다.

박완서 작품은 역사의 격랑을 타고 건너온 시간 시간의 상찬이다. 어느 지점에서 바라봐도 쉽고 재미있다. 게다가 발칙한 위트를 만나면 무릎을 친다.

작가는 떠나도 좋은 작품은 남는다. 인간이 떠나도 자연은 남는다. 다음 세대에게 쓰레기더미를 물러줄까 두렵다. 난생처음 겪는 팬데믹 앞에서 생각한다. 글로벌, 지구촌을 외치던 우리는 순정한 것을 모독한 죄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세계적 난국 앞에서 의혹과 원망, 불신으로 제일 먼저 서로에게 담을 쌓았다.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19는 자연에서 멀어진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경종이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모독을 떠올린다. 알고 지은 죄와 알지 못하고 행한 죄에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옴마니반메홈

 

 

 - <생명과문학> 2021, 여름호. 통권 제1호,  창간호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어머니 / 노정숙  (0) 2021.09.03
선한 그들 / 노정숙  (0) 2021.06.30
<문학의오늘> 시 2편  (0) 2021.06.03
그 후, 15년  (0) 2021.03.16
어느 날 무심히 / 노정숙  (0) 20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