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독서의 신' 탕누어

칠부능선 2019. 4. 8. 19:51

 

                                                      

이런 아침을 먹으며, 종일 책에 코 박고 있던 시간이 그립다. 김포에서.

 

 

 

 

탕누어의 말을 들으니 내가 글을 못 쓰고 책에 묶여 있는 이유를 알겠다.

인간은 편하고 즐거운 일에 쏠리는 거다. 그래도 숙제를 끼고 카페에 홀로 나앉아 있고 싶지는 않다.

내가 카페에 가는 건 친구들과 담소, 맛난 커피, 차라리 멍 때리기... 이럴 때다.

책상에서 침대로 공간이동이 용이하게 바꿔놓았다. 앉아서, 누워서 눈을 혹사한다.

알량한 청소는 동그란 로봇이 제법 한다.

전에는 급한 성질에 못 보고 있었는데 이제 로봇청소기 성능도 좋아지고 내 성격도 느긋해졌다.

의무는 재켜두고 탐닉에 시간이 마구마구 간다. 나도 늦게 더 늦게 물리가 트여도 그만이고 안 트여도 상관없다. 

그래도 책을 가지고 놀수 있는 게 어디냐. 이 봄날, 꽃구경 보다 책이 나를 더 유혹한다.  

 

 

 

 

[탕누어 인터뷰①] ‘독서의 신’에게 독서를 묻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84079.html#csidx37c922d65479a339c8865bd0c2fcf3e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저자


20대부터 매일 8시간 독서
“글쓰기 집중하려 카페 나와”
“책은 가장 가성비 좋은 물건”

 

독서라는 인간 활동의 가치가 의심받을 때 누구를 변호사로 세우면 좋을까. <마르케스의 서재>를 읽은 뒤, 탕누어(61)라면 그 역할을 십분 감당해주리라고, 아니 이 책으로 이미 그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지난 15일 대만 타이베이 지하철 중샤오둔화역(忠孝敦化站) 인근에 있는 카페에서 탕누어를 만났다.

언론 인터뷰를 하는 날임에도 맨발의 샌들을 신은 편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타이베이 시내 카페들을 전전하며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써온 그의 삶이 궁금했다. 인간에 대한 정의도 바꿔놓는다는 인공지능 시대에 독서라는 인간의 행위가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


-원래 융캉제에 있는 카페에 있다가 최근에 이 카페로 옮겨온 걸로 아는데 이 카페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카페에서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도시 안에 있는 많은 생명체가 다 나보다 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지금 노년이지만, 지금 보이는 창밖 세상이, 가게, 사람, 나무, 집 등 많은 것들이 대부분 다 저보다 젊습니다. 1992년부터 정식으로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 지금처럼 매일 글을 씁니다.
지금까지 거쳐온 카페가 10개를 넘었을 거예요. 카페가 문을 닫으면, 새로운 카페를 찾아야 했습니다. 융캉제에 있는 카페는 가장 편안했던 가게예요. 하지만 가게 임대료가 올랐습니다. 카페 사장과 건물주가 협상이 안 돼서 결국 스타벅스 카페로 바뀌었어요. 저는 스타벅스처럼 시끄러운 카페는 좋아하지 않아서 이 카페로 옮겨왔습니다.

한 카페를 떠나게 되면 슬프죠. 왜냐하면 카페는 제가 이 세계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곳이니까요. 제가 카페에 나와 있는 건, 곧 제 서재를 세상 밖으로 가져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카페들은 단순한 카페가 아닙니다. 제 생활 노선, 이동 방식, 밥 먹기, 걷기, 이런 것들이 모두 묻어 있는 공간입니다. 카페를 하나 옮기면 생각 보다 바뀌는 것이 많은 거죠. 좋은 점도 있습니다. 카페를 바꾸면 새 직원도 보고, 다른 손님, 다른 풍경과 사람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타이베이를 만나는 느낌이에요.”


-집에서 더 안락하게 여러 책을 골라 읽고 건강을 위해서 좋은 책상과 의자를 구비해서 읽고 쓰면 더 편할 것 같은데, 카페에서 글을 쓰는 이유가 뭔가요?
“저희 집은 좁아서 서재가 없습니다. 작업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서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오히려 책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글쓰기보다 편한 일이기 때문이죠. 자료를 찾는다고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 경우도 많아요. 독서에 숨어버리면 글을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카페에서 작업하면 책을 많이 가지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글이 잘 안 써지거나, 쓰기 귀찮아져서 책만 보는 것을 피할 수 있어요. 여기 나오면 글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을 조여야 해요. 오늘 글이 잘 안 써진다 싶어도, 비어있는 원고지와 마주 앉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전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기억으로 글을 씁니다. 만약에 완벽하게 옮겨야 한다면 집에 가서 찾아보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전자 제품을 안 써요. 핸드폰도 안 쓰고 컴퓨터도 없어요. 하지만 가끔은 제 아들의 아이패드를 씁니다. 급하게 찾아야 할 게 있으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써야 하는 책만 가지고 나오는 것은 제가 의도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소중한 작업 시간 안에 글만 쓸 수 있기 때문이죠. 글을 다 쓰고,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제 진정한 독서 시간을 보냅니다.”

 

-<열독 이야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책이 등장하는데 혹시 그동안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세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분야 책을 주로 읽습니까.
“제가 그동안 몇 권을 읽었는지 세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의식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네요. 습관이 되니까 나중엔 그냥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이제 독서는 제게 생활 속의 자연스러운 활동입니다. 지금도 어디에 있든 손에 책 한 권이 없으면 뭔가 두고 온 것처럼 부자연스러워요.
제게 가장 곤란했던 것은 학과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분야를 다 알아야 했기 때문이죠. 제겐 경제학, 물리학, 정치학을 읽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억지로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극복했습니다.
한창 책을 읽은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은 6~8시간입니다. 독서 속도는 느리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이삼일이면 책 한 권을 읽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책 내용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칸트의 철학책은 천천히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책 한 권 읽는 데에 일주일을 넘기진 않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저는 왜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책엔 위대한 사상가의 엄청난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저자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그가 평생 제대로 쓸 수 있는 책은 10권이 채 안 됩니다. 나이키 신발 한 켤레 살 돈으로 이런 위대한 사람들의 한평생을 살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책이야말로 가장 저렴하고 가성비 높은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저술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9시에 카페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작가들이 밤에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지속적이고 진정한 저술은 낮에 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작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지요. 글을 쓰기 전에는 다른 어떤 일에도 주의를 빼앗기지 않아요. 나보코프는 신문조차 오후에 읽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가장 좋은 시간을 저술에 쓰는 거죠.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 S. Eliot)도 아침에 글을 썼습니다. 이런 유명한 작가들도 격정이 아니라 집중력과 이해력으로 글을 쓴 거죠.
저도 하루 중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카페에 와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두 문단을 쓸 수 있습니다. 아침에 출판사에 출근하고 오후에 나와서 한 문단 더 썼죠.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하루에 네 시간 정도 저술합니다. 아침부터 점심을 조금 지난 시간까지 쓰는 겁니다. 이 카페에선 아주 저렴하게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사무용 책상’을 쓸 수 있고, 밥을 해주는 사람도 있어서 가성비가 아주 좋습니다.
글 쓰는 속도는 느린 편입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생각도 하고 고쳐보기도 합니다. 만년필로 쓰면 하루에 6000~8000자를 쓸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300~500자만 남습니다. 오후 1시에서 1시반 사이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가면 일상생활을 하는 거죠.
저는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씁니다. (가방을 가져와 소지품을 보여주며) 볼품없지만 제가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들입니다. 잉크출판사 추안민 사장은 제 좋은 친구라서 원고지를 인쇄해다 줍니다. 저술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수공업이죠. (웃음)
이 원고는 다 쓴지 1년이 넘었어요. 올해 1월부터 이 원고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은 아직 정확히 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제목은 <나이, 독서, 글쓰기>(年紀、 閱讀、 書寫)입니다. 나이는 중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제가 60살까지 사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 나이에 다시 독서와 저술을 뒤돌아볼 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썼습니다. 제가 예전에 자주 썼던 독서와 저술에 나이라는 변수를 넣은 것이지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한테 보이는 것들이 모두 나보다 젊구나.’ 책을 볼 때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엔 책을 쓴 사람이 모두 대단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내가 경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저자들이 대부분 저보다 젊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를 썼을 때 한 명은 31살이고 한 명은 29살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죽었을 때 52살이었는데, 저는 지금 61살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백, 두보, 헤밍웨이처럼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저보다 젊은 사람이 쓴 작품이 된 거예요. 갑자기 이전과 다른 독서와 저술에 관한 이미지가 생겼어요. 이 책은 이런 이미지를 다뤘습니다.

 

카페에서 저술하는 과정에 대해 묻자 탕누어는 자신의 가방을 가져와 원고지와 만년필, 잉크통을 꺼내보여줬다. “저는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씁니다. 볼품없지만 제가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들입니다. 저술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수공업이죠”라고 말했다.

 

 

 

-요즘은 전문가의 시대라며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만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다양한 분야를 읽는 이유가 뭔가요.
“전문성은 필요하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여러 다른 생각이 있었고, 게을렀기 때문에 전문가의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분야들 사이의 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분야만 깊이 파고들어 가면 우리 삶의 경험과 결합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의 양자역학은 일반적인 언어로 그 원리를 설명하기 힘들어요. 이 학문은 수학의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지만 보편적인 언어로 서술할 수 없습니다. 분야와 분야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중간에서 대화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물리학자가 소설가와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는 각자의 분류법이 있습니다. 자기 분야의 문제가 아니면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의 문제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탈로 칼비노가 <다음 천 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에서 “문학만은 충분히 큰 목표를 세운다. 문학으로 모든 학과를 다 융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상적이지만, 소설은 그 안에서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해줍니다.
제가 젊었을 때 한 선생님이 이 세상을 알고 싶으면 기초적인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리학은 대략 어떤 것을 말하는지, 물리학자들이 어떤 시야에서 세상을 보는지, 물리학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긴 시간 동안 저는 억지로 물리학,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이 지식을 모르면 대답할 수 없고 생각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으로 한 학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 편할 수 있겠지만 편한 게 꼭 좋은 건 아니잖아요. 저도 젊은 시절 경제학을 공부할 때 반년에서 일 년 동안은 뭘 공부하는지 전혀 몰랐었어요. 케인스의 경제학책을 읽었을 때 모든 글자를 읽을 순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몰랐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해되더라고요. 제겐 특별한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탕누어 인터뷰②] 기계는 합리적이나, 인간은 불합리하다

 

-스무살 때부터 하루 6~8시간을 책 읽는 일을 20년 넘게 지속해오다가 45살이 되어서 진정한 첫 책을 쓰셨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나요. 이제 내 책을 써야겠다는 느낌은 어떻게 왔나요.

 “제 아버지는 건축 사업을 하셨어요. 제가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것을 보시고 제가 나중에 공대에 가기를 바라셨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문학의 길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대만대학교에 진학하기 전인 18살에 <삼삼집간>(三三集刊)이란 문학잡지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창간인 중 하나가 저였습니다. ---

옛날에 저는 그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예를 들어서, 주톈신은 생활 속에 서 본 것, 느낀 것을 모두 소설로 써낼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저만의 표현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마흔살이 돼서야 <한자의 탄생>(원제는 ‘문자 이야기’)이라는 책을 썼어요. 제가 문학이란 영역에 들어가서 첫 책을 써내는 데 25년이 걸린 거 죠.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도 40대에 완성된 작품이에요. 제가 어리석어서 저와 잘 어울리는 표현 방식을 찾는 데 20년 이 넘게 걸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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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책인 <한자의 탄생>도 어쩌다가 쓴 책이에요. 이 책은 원래 지적인 방송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했었어요. 방송용이다 보니 좀 쉽게 썼죠. 두 번째 책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부터 제 목소리로 쓸 수 있었어요. 물론 20여년 동안 생각해온 것 이 언제나 똑같을 순 없죠. 그래서 이런 인터뷰를 할 때 항상 긴장됩니다. 저는 제가 옛날에 쓴 글을 잘 안 봅니다. 보기가 무서워요.”

 

-당신은 ‘독서의 수호신’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독서의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 경지에 오르면 뭐가 보이는지 궁 금합니다.

“제게 전문성이란 곧 세상을 보는 위치입니다. 전문성은 다른 위치에서 보는 능력이라는 거죠. 전문성은 곧 모르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능력입니다. 다른 전문 영역에 있는 사람과는 같은 세상에 있어 도 다른 것을 봅니다. 저와 나이 든 목수가 똑같이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두 사람이 보는 것은 절대 같을 수 없어요. 전문가들은 거기에 있어야 하지만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가벼운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유명한 질문인데요, 무인도에 책 3권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지고 가 겠습니까.

 “통조림과 물을 가져가야지, 왜 책을 왜 가지고 가겠습니까. (웃음) 저는 샤토브리앙의 회고록,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 건>, 미시마 유키오의 4부작 소설을 가져가겠습니다. 미시마의 소설은 다시 읽어도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요즘 일본근대문학을 읽고 있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 보다 미시마 유키오가 더 낫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레이엄 그린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사건의 핵심>, <코미디언>, <아바나의 남자> 등 그의 작품을 다 좋아 해서 고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스무번이나 올랐는데 결국 상을 못 받았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 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쓴 영국의 첩보소설가 존 르 카레도 그레이엄 그린이 발굴한 작가죠.

 

-바둑을 소재로 이야기를 많이 하시던데, 구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합니다. 인공지능 시 대에서 인간의 지식과 독서란 어떤 의미일까요.

 “요즘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도 이 질문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기술이 완성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우린모릅니다. 이것은 역사의 법칙입니다. 인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법칙을 찾아내는데 어디 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끊임없는 실험을 거쳐야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공 지능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그냥 조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야 인류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 할지는 모르잖아요. 인공지능 때문에 생길 문제도 있을 겁니다. 인공지능도 감각 능력과 판단 능력이 있습니다. 이건 빅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것이에요. 하지만 인류의 감각과 판단은 복잡하고 가끔은 합리적이지 않아요.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은 불합리하고 복잡합니다. 물론 나중에 인공지능에게 이것조차 가능할지 모르지만요.”

 

 -인공지능과 증강현실(VR) 같은 기술의 발전과 독서의 미래에 대해 비관주의인지 낙관주의인지 묻고 싶습니다. ‘독자들이 기술에 적응해가는 속도도 완만하기 때문에 출판사나 작가들도 서서히 거기에 맞춰갈 수 있다.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 더라도 그것은 파괴적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배로 옮겨탈 시간이 있다’ 이렇게 봐야 할까요. 아니면 종이책과 출판사의 쇠락이 급속도로 이뤄질까요.

 “기술 발전이 독서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엔 책을 사지 않고선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알기도 엄청 어려운 일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지식을 접하기 아주 쉬워졌어요. 오히려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지식과 어울려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준비할 필요 가 없어졌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잖아요. 많은 사람이 제게 책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용이 등장할 수 있는지 물어봐요. 이건 모두 제 기억에서 나온 거예요. 책을 읽고 기억에 저장해 두는 거죠. 오늘 이 질문을 받고 제가 걱정한 것은, 인공지능은 인류의 기억에 대한 침략이에요. ‘알고 싶을 때만 검색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무엇을 검색하고 찾아야 할지도 모르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그 지식 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죠.”  

 

 -<마르케스의 서재에서>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자유의 신봉자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중국과 긴장 관계에 있는 대만의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약받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서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자유란 것을 조금 완벽하게 생각하자면 저는 사람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대만에 사는 것이 아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른 점에 있어 자유롭지 않다는 거죠. 대만은 사실 상업적인 견제를 받고 있습니다. 자본은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죠. 대만의 저술이 중국보다 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사회에 살면서 우리도 모르게 제한을 받고 있어요. 출판사가 이런 책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 작가들도 쓰지 않는 거죠. 하지만 중국은 13억 인구가 있기 때문에 내가 남다른 생각을 해도 누군가는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중국 책이 대만 책보다 다양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다 알다시피 곤란이 조금 있을 겁니다. 제 책 같은 경우는 중국에 가면 얇아집니다. 중국에서 책을 내면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사를 거쳐 일부 내용이 없어지는 거죠. 이럴 때 제 원칙은 하나에요. 제가 쓰지 않은 것을 추가하지는 말라는 것. 올해는 지난해보다 이런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정치적인 힘이 언제까지 얼마나 언론을 제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은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보다 힘이 약하지 않습니다. 상업화의 시대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라짐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비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대도 없어요. 하지만 중국은 아주 뚜렷해요. 제가 들은 소식이 있는데 중국에서 책을 발행할 때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필요한데 올해부터 번호를 반으로 줄인다고 합니다. 책을 반으로 줄이는 거죠. 이렇게 함으로써 통제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몹시 나쁜 일이죠. 그래서 아직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계속 이렇게 갈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물음표죠. 문학은 곤란한 환경 아래에서 특별한 것을 만들어낼지도 몰라요. 저는 이렇게 바랍니다.”

 

 -문학에선 정치와 독재정권의 억압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문학 또한 중요합니다. 중국에서 이런 발언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의 상당히 중요하고 큰 부분이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문학은 곤란한 상황에서 특별한 결과를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보코프의 생각은 문학이 이런 압박 하에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을 극적으로 만들면 문학이 너무 단순해진다고 합니다. 도구화뿐만 아니라, 너무 단순해진다는 거죠. 문학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입니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로 쉽게 나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나보코프가 탄압을 받은 러시아 문학을 말할 때 그의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소설은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불쌍해하지만, 그 사람들의 작품을 평가하라고 한다면 좋은 문학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작가들이 좋은 환경에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평가는 그 작가들에게 불공평한 것이 라고 말합니다. 그 작가들은 존경할 만하고 측은해할만 하지만 문학적인 측면에서 엄격하게 볼 때 이런 문학은 확실히 피해를 받았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다시 찾아서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표현이 너무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라마다 정치적인 힘이 미치는 영향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와 대만에서 이런 이야기 할 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나라마다 사람들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솔직히 아직도 대만에서 정치적인 압박에 대해 쓰는 사람은 별로라고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나는 독립적이고 용감한 지식인’이 라는 것을 표현하는 게 솔직히 죽은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처럼 무용한 일이에요. 이런 식으로 책을 내고 화제를 일으키고 싶은 사람을 저는 무시하고 싶어요. 하지만 중국에선 아직도 이런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도 다른 문제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사회마다 처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은 강한 상업적인 힘이나 강한 정치적인 힘이나 강한 인터넷의 힘에 직면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과 사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하나는 돈이고 하나는 정치적인 힘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를 비판함으로 자기 용감함을 드러내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왜냐하면 이런 행동은 문학의 넓이를 좁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끝)

 

 

타이베이/글·사진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