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률시에 대한 얄팍한 설명
- 이탁오
내용이 평담하면 씹는 맛이 없고, 사상이나 감정이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나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조탁이 지나쳐 화려하기만 할 뿐 내용이 없는 것도 결단코 좋지 않다. 깊이 가라앉아 사색적이면 골머리가 아플 수도 있으니,
참착함을 쉽게 드러나는 대신 양강陽剛의 기세가 모자라게 된다. 쉽게 지으려 해도 안 되고, 어렵게 지으려 해서도 안 된다.
격률에 구속되면 격률의 제약을 받게 되니, 이는 시의 노예라 하겠다. 이 경우 시가 비천해지면서 오음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격률의 구속을 받지 않아 운율이 파괴되면, 이는 시율의 파괴자이다. 이런 시는 감정이 문채를 넘어서게 되며 오음 또한 계통을
잃어버리는 결점이 발생하게 된다. 음율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문채가 없고, 부조화하면 운율의 맛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원래 운율과 문채는 사람의 성정에서 우러나오고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되니, 이 어찌 견강부회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성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면 예의에도 저절로 합당해지니, 본성의 바깥에 따로 적당한 예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견강부회하면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까닭에 자연스러움만이 참된 아름다움이 되니, 본성의 바깥에 또다시 자연스러운
무언가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성정이 맑은 사람의 음조는 당연히 시원스럽고, 느긋한 사람의 음조는 완만하다.
광달한 사람은 호탕한 소리를 내고, 기상이 넓은 사람은 물론 장렬하며, 침울한 사람은 슬프고 애처로운 한편
괴팍한 사람은 기묘하게 된다. 그 사람의 격조가 그런 음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는 모두 성정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하겠다.
사람마다 감정이 없을 수 없고 또 개성이 없을 수 없을진대 어떻게 일괄적이기를 구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른바 자연스러움이란
일부러 그러자고 해서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만약 고의로 자연스럽게 만들려 한다면 그것이 견강부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자연지도는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분서1> 중에서
'놀자, 책이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괴테 (0) | 2018.09.27 |
---|---|
<시인의 죽음> 다이 호우잉 (0) | 2018.09.26 |
<무지개와 프리즘> 이윤기 (0) | 2018.09.21 |
<슬픈 열대> C.레비 스토로스 (0) | 2018.09.20 |
<훔친 책 빌린 책 내 책> 윤택수 (0) | 2018.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