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 릴레이> 4
이윤기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8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애통하다.
그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 <그리스인 조르바> <푸코의 진자>에 코를 박던 시간이 있었고,
첫 산문집인 <무지개와 프리즘>을 시작으로 그의 산문 전작주의가 되었다.
일면식이 없었어도 그리운 이윤기 선생님, 그리운 마음에 가끔 그의 작품을 필사한다.
어른의 학교
-이윤기
버려야 할 버릇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만, 나에게는 요즘 들어서 부쩍 고치려고 힘을 많이 기울이는 더러운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별로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은근히 깔보는 버릇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척하다가도 나이를 알게 되면 속으로, 응, 내가 입대하던 해에 너는 아무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고 다녔겠구나, 혹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태어난 것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이런 식입니다. 물론 욕먹을까봐 말은 그렇게 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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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자동차 여행에서 우리 일행은 휴대용 가스버너와, 휴대용 가스를 여러 통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북미 대륙 서부의 사막지대로 접근하면서부터 휴게소에는, 프로판 가스통을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 위험하다는 경고문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온도가 오르면, 가스통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가스통에도, 섭씨 40도가 넘으면 폭발할지도 모르니까 사막지대로 들어갈 때는 자동차에 두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텍사스 주 경계를 넘고부터 기온은 40도를 웃돌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철에 주차장에 주차해 있을 동안 자동차 안의 온도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잘 아시지요? 우리 어른들은 결국, 다섯 개나 남은 가스통을, 누군가가 주워 쓸 수 있도록 휴게소의 나무 그늘에다 유기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만일의 경우가 걱정스러웠습니다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런데 여행 중의 영상 기록을 담당하던 고등학교 3학년짜리(지금은 대학생) 아들이 지나가는 말로 이러는 겁니다.
「아이스박스에는 얼음과 먹을거리만 넣는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
아이의 말을 좇아 우리는 가스통을 아이스박스에 넣었습니다. 뒤에 수소문해 보고 알았거니와, 우리는 섭씨 50도가 넘는 북미 대륙 서부의 사막지대에서도 끄떡없이 가스통을 가지고 다닌, 희귀한 여행객이었더군요.
자식 자랑이 아닙니다. “뒤에 난 사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後生可畏)”느니, “아랫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不恥下問)”느니 하는 옛말 그르지 않더라고요. 어린 것들은 능히 스승 노릇을 하니 우리 사는 데가 온통 학교가 아니고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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