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네

어떤 세상 / 임은자

칠부능선 2012. 10. 2. 17:10

 

어떤 세상

   

 

피어오르는 꽃무더기

살아나는 들과 산, 흐르는 냇물

붓길 따라 환하게 웃는 꽃잎

깊어지는 물소리

깊이 숨었던 것들이

문 열고 나온다.

 

썩지 못하는 비닐이 뒹구는 들판

동강난 산허리의 신음소리

빛 바랜 꽃잎

이끼 낀 냇물에 힘겨운 모래무지

길가에 흐드러진 개쑥부쟁이는

차라리 용감하다.

 

햇살을 감춘 구름 아래

맨몸으로 노래하는 바람

허리가 휘어도 쉬지 못하는

무릎이 꺾여도 멈추지 않는

꿈꾸는 세상이

누추한 창에 걸린다.

 

삶 가운데에서 우리가 만나는 자연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나무의 생성과 소멸, 깊은 숲 속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 아스팔트 갈라진 틈으로 여린 목을 내밀고 올라오는 초록의 함성,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철쭉의 화사함은 생명력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인적 없는 계곡 바위틈에 휘도는 물보라,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따뜻한 시선의 화가를 만난다. 화가 임은자는 헐벗은 염전의 소금 창고와 무너져 위태로운 다리, 철지난 바닷가에 방치되어 녹슨 폐선과 꺾여져 생을 마친 나무등걸도 인식의 마디로 보여준다.

좋은 소재를 얻기 위해서 아무리 먼 곳도 험한 곳도 가리지 않는다. 바닷가에 버려진 조개껍질, 어느 포구에 널려진 밧줄도, 길가에 굴러다니는 낙엽, 베어놓은 나무토막도 그의 눈길에 닿으면 생명을 얻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자연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가 추구하는 삶에서의 사물과 자연의 연결고리를 찾는 고뇌의 흔적이 묻어 있다.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를 고민하며, 거대한 자연의 신비 앞에 재창조를 위해 많은 실험의 과정을 거친다. 바람의 느낌이나 햇살의 눈짓을 따라 헤매는 오랜 시간이 그의 거대한 작품에서 숨쉬고 있다.

감각과 빛,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혼신의 노력을 지켜보았다. 보는 눈을 택할 것인가 생각하는 눈을 택할 것인가 자신만의 화폭을 얻기 위해 끊임없는 열정으로 늦은 시작의 벽을 넘는다.

숲 속의 예비된 거목, 화가 임은자가 첫 발을 내딛었다.

자연을 닮은, 자연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 화폭에서 우리는 치열한 수련의 결정(結晶)을 볼 것이다.

늘 전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앞으로 이어질 큰 발자국을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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