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비행장을 떠나며 / 허수경

칠부능선 2010. 9. 10. 10:33

 

비행장을 떠나면서

허수경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무표정했어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 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 사이에

천만 년의 세월을 살던 바다를 메워 새 집을 짓다가 초밥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송충이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막막한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워서

20세기의 노래를 부르며 짐짓 모른 척 했어, 당신의 얼굴 위를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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