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방랑규칙 / 바쇼

칠부능선 2006. 9. 28. 11:15





같은 여인숙에서 두 번 잠을 자지 말고,

아직 덥혀지지 않은 이불을 청하라.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어떤 것,

같은 땅 위를 걷는 어떤 것도 해치지 말라.

옷과 일용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지 말라.

물고기든 새 종류든 동물이든 육식을 하지 말라.

특별한 음식이나 맛에 길들여지는 것은 저급한 행동이다.

'먹는 것이 단순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라.

남이 청하지 않는데 스스로 시를 지어 보이지 말라.

그러나 요청을 받았을 때는 결코 거절하지 말라.



위험하거나 불편한 지역에 가더라도 여행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

꼭 필요하다면 도중에 돌아서라.

말이나 가마를 타지 말라.

자신의 지팡이를 또 하나의 다리로 삼으라.

술을 마시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마시더라도 한잔을 비우고는 중단하라.

온갖 떠들썩한 자리를 피하라.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말라.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치켜 세우는 것은 가장 세속적인 짓이다.

시를 제외하고는 온갖 잡다한 것에 대한 대화를 삼가라.

그런 잡담을 나눈 뒤에는 반드시 낮잠을 자서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성간의 하이쿠 시인과 친하지 말라

하이쿠의 길은 집중에 있다.

항상 자신을 잘 들여다 보라

다른 사람의 것은 바늘 하나든 풀잎 하나든 취해서는 안된다.

산과 강과 시내에게는 모두 하나의 주인이 있다.

이점을 유의하라.

산과 강과 역사적인 장소들을 방문하라,

하지만 그 장소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는 안된다.

글자 하나라도 그대를 가르친 사람에게 감사하라.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가르치지 마라,

자신의 완성을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남을 가르칠 수 있다.



하룻밤 재워주고 한 끼 밥을 준 사람에 대해 절대 당연히 여기지 말라.

사람들에게 아첨하지도 말라.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천한 자이다.

하이쿠의 길을 걷는 자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저녁에 생각하고 아침에 생각하라.

하루가 시작될 무렵과 끝날 무렵에는 여행을 중단하라.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이 멀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출처<한줄도 너무 길다>/ 하이쿠 시모음집/ 류시화 엮음/ 도서출판 이레
바쇼(1644~1694)는 일본 에도시대전기에 이가(伊賀; 지금의 三重縣)의
우에노에서 태어나 *하이쿠(俳諧)를 대성한 유명한 시인.

1. 한 줄밖에 않되는 하이쿠[류시화]

길에서 검객을 만나거든 나의 검을 보여 주고,
그가 시인이 아니거든 너의 시를 보이지 말라.
임제선사(중국, 9세기)

하이쿠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형태로 유명하다.
여기 한가지 일화가 있다.
프랑스 어느 대학에서 하이쿠를 강의하던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교수님, 제목에 대한 강의는 그만하고 이제 본문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한 줄밖에 안 되는 하이쿠 시를 학생들은 시의 제목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이쿠는 한 줄의 운문으로 계절과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의 실존에 가장 근접한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 바쇼와 이싸의 작품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연습 문제에는 실제로 하이쿠를 지어 보라는 요구도 있다.

뉴욕타임스 지는 지난 한 해 동안 뉴욕 시민을 대상으로
교통과 계절을 주제로 한 하이쿠를 공모해 날마다 신문 한구석에 싣기도 했다.
오늘날 하이쿠는 그토록 세계적이 되었다.
유럽에는 아예 스스로 하이쿠 시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고
영문 하이쿠 시집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하이쿠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적지 않다.
알렌 긴스버그나 게리 스나이더 같은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 그렇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체슬라브 밀로즈는 하이쿠 애독자였다.
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해도 하이쿠적인 시인 역시 많다.
윌리엄 워즈워드가 대표적이다.
다음 시를 봐도 그가 얼마나 하이쿠의 세계에 근접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시는 압축이 생명이다.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생각나는 대로 글을 풀어 나가는 다른 문학과의 차별성이 거기에 있다.
시는 압축이고, 생략한다.
말을 하다가 마는 것, 그것이 시의 특성이다.
시는 하나의 말없음표...... 그 말없음표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감정이나 깨달음 같은 것을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이쿠[俳句, haiku]: 일본의 시 형식 가운데 하나. 홋쿠[癸句]라고도 한다. 3행 17음절로 구성되었으며 각 행은 5·7·5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31 음절의 단카[短歌]라는 시의 처음 3행에서 유래했다. 하이쿠는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 1603~1867]에 단카와 더불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대에 거장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이 시 형식을 매우 세련되고 의식 있는 예술로 승화시켰다. 바쇼가 쓴 대부분의 하이쿠는 실제로 렌가[連歌]의 홋쿠였다. 하이쿠라는 말은 하이카이[俳諧 : 17음절의 우스꽝스러운 시]의 하이와 홋쿠라는 단어의 쿠로부터 유래했다. 하이카이와 홋쿠라는 2개 용어는 수세기 동안 하이쿠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원래 이 형식은 주제 선정에 있어 비록 암시적이지만 분명한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4계절 중의 어느 한 계절을 암시하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묘사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후에 주제선정 범위가 넓어졌고 가능한 한 가장 적은 단어수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로 남게 되었다. 그밖에 하이쿠 거장으로는 18세기의 요사 부손[與謝蕪村]과 18~19세기의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그리고 19세기말의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등이 있다.



대황화(大黃河) - 노무라 소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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