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그들의 연애편지

칠부능선 2006. 8. 31. 10:51
 

내 생애 가장 찬란했던 순간, 그대에게 쓴 한 통의 편지

그들의 연애편지가 당신의 기억을 부른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달콤하거나, 

한잔의 투명한 소주처럼 아릿한 사랑의 추억들……

 

김훈, 하성란, 함정임, 마광수, 김동리, 이문재, 박상우

우리 시대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연애편지를 공개한다


소설가이자 문창과 교수인 김다은이 기획한 『작가들의 연애편지』는 문인들로 하여금 서랍 속에 꼭꼭 숨겨뒀던 편지를 꺼내게 하고, 서간문이란 오래되고도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실험하게 하여 ‘연애편지’라는 소중한 유산을 한자리에 모으기까지 무려 삼 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기에 공개조차 금기시됐던 연애편지는 어렵게 세상의 빛을 본 만큼 더욱 귀하고 귀하게 읽힌다.

 

                   

 

김훈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pp. 197~199에서)

 

사랑은 형체가 없어, 정의할 수도 한데 가둘 수도 없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 말하고, 언제부터 사랑이 시작됐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소설가 김훈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의 기록을 들췄다. 오랜 시간 품어왔으나 여전히 홀연한 사랑,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 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은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닿는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너머의 밀물과 썰물이 이 내륙 하천을 깊이 품어서 양안(兩岸)의 갯벌은 늘 젖어 있다. 밀물을 따라서 내륙으로 향하는 숭어떼들이 수면 위로 치솟고 호기심 많은 바다의 새들이 거기까지 물을 따라 날아와 갯벌을 쑤신다. 그 작은 물줄기는 바다의 추억으로 젖어서 겨우 기신기신 흐른다. 보이지 않는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서정주의 「격포우중」에서)와도 같이 젖어서 질퍽거린다. 저녁 썰물에 물고기들이 바다로 돌아가고 어두워지는 숲으로 새들이 날아가면 빈약한 물줄기는 낮게 내려앉아 겨우 이어가는데, 먼 것들로부터의 기별은 젖은 뻘 속에서 질척거리면서 저녁의 빛으로 사윈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었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사랑’의 메모장을 열어보니 ‘너’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언제 적은 글자인지는 기억이 없다. ‘너’ 아랫줄에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정맥’이라는 글자도 적혀 있다. ‘너’와 ‘정맥’을 합쳐서 ‘너의 정맥’이라고 쓸 때, 온몸의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라는 글자 밑에는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라고도 적혀 있다. 치타, 백곰, 얼룩말, 부엉이 같은 말을 걸 수 없는 동물들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안쓰러운 단어 몇 개를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건너가려 했던 모양인데, 나는 무참해서 메모장을 덮는다.

 

 

하성란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pp. 15~17에서)

 

때로 연애는 엄청난 속도로 불어오는 태풍에 마주한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위태롭다. 태풍이 휘돌고 간 자리는 난장처럼 심란하고, 멍울처럼 뼈아프다. 시간이 정지한 고궁 안에서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는 그녀는 시간을 놓쳐버린 여린 아이와 같다. 돌풍처럼 스쳐간 그에게 끝내 이별을 고하는 소설가 하성란의 연애편지. 지금, 당신의 사랑은 태풍이 지나가는 위태로운 순간에 처해 있진 않습니까!

                          


  H씨. H씨는 왜 느닷없이 내게 그런 편지를 보낸 거냐고 꾸중조로 저에게 말했지만 그냥 그것은 연상 작용처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냥 어느 날 저녁 H씨가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 지난주 내내 제 방은 태풍의 전조들이 보였지요. 어떤 사람의 경우 열정이니 정염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리미로 잘 다려 옷걸이에 걸어놓은 듯한 세탁물이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의 사랑은 상상되지 않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이런저런 일로 띄엄띄엄 만날 때마다 H씨도 저에게 그런 인상을 받았을 줄 압니다. 저의 경우 열정과 정염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겸연쩍어 속에 담고 있기에 너무도 불편합니다. 제 몸에 난 마개들을 열고 터져 나올 듯합니다. 장난이라니요, 제가 왜 H씨를 상대로 장난을 하겠습니까.


돌풍은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부딪히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듯합니다. 돌풍이 분 시간은 기껏해야 삼사 분, 오륙 분. 그 짧은 사이에 지난밤의 평화는 깨졌고 모두가 잠든 사이에 바람이 누군가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채갔습니다. 그런 대기 변화처럼 제 심정을 읽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잠자는 사이, 제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H씨의 답장은 너무도 냉랭했습니다. 짧은 네 줄의 문장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혹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하고 행간에 숨긴 마음은 없었나. H씨는 장난을 친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 말하더군요. 흙장난 하지 마.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H씨는 몇 해 전 여름, 같이 산에 가자고 했던 그 말은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며 단호하게 편지를 맺었습니다.


  어제 혼자 덕수궁 뜰을 걸었습니다. 해질녘이라 사위는 어둑신해졌지요.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어린 제가 보였습니다. 덕수궁은 어릴 적부터 자주 오던 곳입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을 뿐더러 중학교 문예반 선생님은 토요일이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셨더랬지요. 토요일이면 덕수궁 잔디밭에는 젊은 연인들로 꽉 차고는 했지요. 그때는 그렇게 넓던 곳이 이제는 너무도 좁아 뜰을 두 번이나 돌았는데도 마음이 정리되질 않았습니다. 소쿠리처럼 봄바람이 제 몸을 통과했지요.


  뉴스에서 돌풍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풍은 상가의 간판을 떨어뜨리고 가로수를 뿌리째 뽑아놓았다는군요. 하지만 어디에도 돌풍에 날아간 강아지 이야기는 없네요.


  토요일 한 시. 창덕궁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창덕궁은 덕수궁보다 넓으니 걷다보면 이 마음이 진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상우 “첫 번째 연애편지에 대하여” (pp. 21~22, pp. 28~29에서)

 

거뭇한 코밑과 굵직한 저음, 변해가는 몸처럼 어느 날부터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교실로 들어선 젊고 아름다운 여선생님만 보면, 왜 그리 침은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은 선뜩선뜩 무너지는지……. 중고등학교 시절, 여선생님을 첫사랑으로 품었던 남학생은 사뭇 많을 것이다. 열다섯의 나이에 사랑을 느낀 여선생님께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 진심을 고백하는 소설가 박상우의 편지. 선생님, 지금도 그때처럼 고운 모습이신지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은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제 나이 열여섯에 선생님께 보낸 넉 장짜리 장문의 편지가 저에게는 지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쓴 연애편지였습니다. 그것을 쓰던 당시의 설레던 감정이 엊그제의 일처럼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목이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뺨과 귓불이 달아올라 편지를 다 쓰고도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때…… 그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다니던 시골중학교 영어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오시던 때가 1972년 3월이었습니다. 그해 제 나이는 열다섯이었고 선생님은 스물셋이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온 선생님 모습을 뵙고 저는 당시에 주가를 날리던 올리비에 허시라는 여배우를 떠올렸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밝은 표정과 긴 생머리가 저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흰 치아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모습, 가끔씩 쓸어 올리는 긴 머리를 지켜보노라면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저의 어린 가슴이 선뜩선뜩하게 무너져 내리는 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 늦은 가을 밤, 그동안 선생님과 주고받은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하숙집 마당에서 불태우는 것으로 저는 혼자만의 첫사랑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그 뒤로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는 더 이상 선생님과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선생님의 서울 집주소만 달랑 들고 마포구 합정동 일대를 정신없이 돌아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과 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볼 때마다 혹시 홍완희 선생님 아니신가요?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명동의 미도파 백화점 앞길을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선생님 모습을 꿈에서 보고 깨어나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웃으며 지나간 시절의 아픈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과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의 경험이 저의 현실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중학교 이 학년이었을 때 선생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제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맹훈련을 하듯 진지한 열정으로 편지를 쓰던 경험은 오늘날 제가 소설을 쓰는 열정과 하등 다를 바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제 인생의 지도를 만들어주시기 위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동화 속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함정임 “푸른 하늘 아래에 너는 존재하고 있다.” (pp. 31~32에서)

 

때로 이성 친구는 동성친구보다 더욱 살갑고 심적인 지척에 있을 때가 있다. 좀더 예민한 촉수를 더듬거리며, 서로의 사유와 감성에 대해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까닭이다. 서로의 안위를 묻고, 연약한 감성을 보듬으라며 다독이는 독일에 살고 있는 함정임의 가장 오래된 이성 친구에게서 날아온 편지 한 통. 나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바로 너였어!


                      
 

이곳에 와서 나는 우리글로 된 책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모국어의 자유로움을 절감하게 된 것도 이곳 생활에서다. 그 언어가 지닌 풍요로움을 너는 벗 삼을 수 있겠지. 너의 불행한 축복일 수 있지 않을까. ……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까. 던져진 시간 보내기. 쫓는 그 무엇의 의미를 상실해 간다고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의지라는 것, 지킴도 힘들고 버리기는 더 어렵다. 그 단어를 소유한 이상 그의 노예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자유, 내면의 자율. 그래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힘이 들기도 하고. 너는 그러리라는 판단이 든다. 아마 알고 있겠지, 나는 너의 영혼을, 내면을, 너의 섬세함을, 그래서 부서지기 쉬운 감성을 사랑했었다.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절망은 살아 움직인다. 어떤 다다름으로. 숨 막힘은 트일 때가 있다. 순간일지라도. 회의와 절망은 필연일 것이다. 생명이 이어지는 한. 너는 이미 그러고 있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글을 보면서.


아마 머지않아 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그 차가운 공기가, 진눈깨비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어느 때는 보름 정도를 햇살을 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 후줄근함을 사람들은 힘들어하지. 그 회색빛의 세상을 나는 좋아했다. 지난겨울의 긴 시간들. 나는 한가로웠고 빛이 없었던 많은 날들을, 바람이 휘몰아치는 밤들을 나는 쾰른에서 보냈었다. 한 면이 창이었던 나의 집. 베란다에서는 쾰른 대성당이 보이기도 했었고, 나는 그곳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그리고 이 땅에서는 마지막으로 여 유있는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 너의 존재는 나의 삶에서 부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참견하는 나의 못남을 이해해주리라 믿고, 너의 생명력을 되찾으면서 간직하기를 나의 마음으로 바라면서.

                                                                                                       1997. 10. 5  Tübingen, J.

 

 

이문재 길 위에서 몸을 생각하다” (pp. 158~160에서)

 

광속의 시대 우리는 가끔 내 몸의 안부를 잊고 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제 속도를 잃어버렸다. 지리산을 에도는 길 위에서, 잃어버린 몸과 인간의 속도를 찾으려는 시인 이문재. 젊은 날 사랑했던 k에게 편지를 띄우며 그는 다시 제 몸을 되찾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몸은 안녕하십니까!


                       

 

 

기억과 추억을 구별하듯이, 나는 연애와 사랑의 경계를 알고 있다. 연애는 정신병적 징후이다. 몸 없는 마음의 질주가 연애다. 몸 없는 마음은 몸이 없어서 오직 상대방의 몸에 집중한다. 상대방의 몸을 광적으로 겨냥할 때, 상대방은 마음 없는 몸이다. 몸 없는 마음과 마음 없는 몸은 결코 만날 수 없다. K, 젊은 날의 내가 그러했다.


연애는 사랑의 영토에서 변방이다. 변방이 아니라면 아주 특수한 지역이다. 연애와 사랑을 혼동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폭이 넓어질수록 유속이 느려지는 섬진강 하류에서 나는 그대에게 뒤늦은 사랑을 말하려 한다. 사랑은 온전한 몸과 마음이 또 다른 온전한 몸과 마음을 만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온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헌신이거나 희생일 터이다. 20여 년 전, 나의 그 무모한 돌진, 그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폭발을 감당해준 그대에게 나는 이제 사랑을 말하려 한다. 헌신과 희생이 아닌 사랑 말이다. 길 위에서 나는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내 몸을 되찾았다. 내 몸의 감각들이 매 순간 되살아나고 있다.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만큼 나는 몸으로 돌아가 있다. 나는 문자 그대로, 갱생하고 있다. 하지만 두렵다. 이 도보순례를 마치고 다시 거대도시로 귀환할 때, 나는 또 얼마나 심한 부적응에 시달릴 것인가. 하지만, 나는 걷기 이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길 위에서 먹고 자고 걸으며 나는 알았다. 감각에 민감할 것, 감각에 충실할 것! 감각이 바로 몸을 복원하는 길의 출발점이었다!


K, 길 위에서 먹은 밥이 그대로 힘이 되고 있다. 섬진강 제방길이 그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나는, 내 몸은 오늘, 오늘이다.



                                 "작가들의 연애편지" 에서 발췌 _김다은 엮음_생각의나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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