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칠부능선 2006. 6. 12. 23:25
 
    연민 COMPASSION.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1.
    “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그를 느낀다고 가정한다면 -쇼펜하우어가 ‘연민(compassion)’이라 부르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통 속에서의 결합, 고통의 일치라 할 수 있는 것- 그가 자신을 미워하면(파스칼처럼) 우리 또한 그를 미워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환각에 시달리거나 미칠까 봐 두려워한다면, 나 또한 환각해야 하고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어떠하든 간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기에 나 또한 동요하며 괴로워하나, 동시에 냉담하며 젖어들지 않는다. 나의 동일화는 불완전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그는 내게 걱정거리를 준다), 부족한 어머니이다. 내가 실제로 그를 보살필 수 있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동요한다.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그 순간, 내가 불행에서 읽는 것은 그것이 나 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가 나를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


    2.
    그리하여 하나의 역전이 내도한다. 그 사람이 나를 제쳐놓고 괴로워하는데, 왜 내가 그 대신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불행이 나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하는데, 왜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그와 일치될 수도 없으면서 그의 뒤를 숨가쁘게 쫓아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 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Vivons!)'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자.


    3.
    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통제된, 애정에 넘쳐흐르면서도 예의바른 이 처신에, 우리는 ‘신중함/부드러움’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개화된, 예술적인) 형태이다.
    (아테(Ate)는 미망(迷妄)의 여신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테의 신중함/부드러움에 대해 말한다. 그녀의 발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땅을 디딜 둥 말 둥하다고.)


    롤랑 바르트,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사랑의 단상> 中

                          Gidi Gov - סורו מנ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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