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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과 수필 / 윤오영

칠부능선 2022. 11. 8. 23:26

곶감과 수필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 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작품은 아니다.

 

 밤(栗)은 복잡한 가시로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 껍질이 있고, 또 보늬가 있고 나서 알맹이가 있다. 소설은 복잡한 이야기와 다양한 변화 속에 주제가 들어있다. 복숭아는 살이다. 이 살 자체가 천년반도(千年蟠桃)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시는 시어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이 문(文)이요 적백색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柹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柹雪)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柹雪)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