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이재무 / 권순진

칠부능선 2014. 7. 24. 14:21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이재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이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

두 눈 반짝이는 나는,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시인이다 거듭 실패하는 동안

제법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어도 눈물은커녕

비웃음만 나온다 동남아시아 가난한 나라

밀입국한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산재당해

오 년치 칠 년치 임금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그것은 그들 개인의 불운일 뿐

나는 이제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

그러니 청승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이제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 몸을

토막 난 막대기로 잘못 알고 함부로

걷어차도 인내에 익숙한 나는 아마

견성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 것이다

 

-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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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되기는 힘들어, 하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10여 년 전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다. 이 말은 80년대와 90년대, 언필칭 386세대 사이에서 자조하듯 퍼졌었다. 80년대 민주화와 변혁을 향해 광장을 달렸던 그들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피둥피둥 살만해지니까 자신이 그렇게 혐오했던 인간 유형으로 바뀌어가고 동지들 또한 비슷한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서 서로 쓴웃음 지으며 그러나 마지막 도리는 힘겹게 단속해 가면서 내뱉는 말이다. ‘아름다운 분노’는 대뇌 안에만 맴돌고 입안에서만 옹알거릴 뿐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이 시는 얼핏 그와 비슷한 자신을 향한 쓰디쓴 자학이고 자조의 넋두리처럼 들린다. 일찍이 김수영 시인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본질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크게 대항하지 못하면서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소시민적 삶의 태도를 반성하였고, 김광규 시인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통해 기성세대로 편입한 혁명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재무 시인의 경우 그와는 좀 다르게 내면과 상반된 반어적 진술을 통해 시적 인상과 의미를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도 자주 울분을 토하다 길게 한숨 쉬고 그러다가 수 틀리면 불쑥 ‘사라진 분노’를 되뇌이곤 하기에 말이다.

왜 그러겠는가. 세상 돌아가는 일이 하도 한심하고 기막힌데 내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졌다 졌어’ 두 발 까진 아니라도 두 손 다 들고 ‘견성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라고 했는데, 그게 또 잘 될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겠다. 사람 구실은 제대로 못해도 최소한 남을 억압하고 횡포를 일삼으며 착취하는 포악한 괴물은 되지 말아야할 것 아닌가. 그리고 5천만이 쫒는 도망자의 시신을 40일간이나 방치한 그런 어이없는 괴물 정권에 대해 끽 소리 못하고 가만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의혹투성이인 변사체 하나가 세월호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속죄양은 절대 되지 못하므로.

나도 ‘쓰잘떼기 없이’ 왈왈 짖어대기 보다는 가능하면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처럼 가만있으려 했으나 도저히 그냥 패스하진 못하겠다. 새삼 생의 덧없음과 어이없음을 안주삼아 소주를 나눠 마시며 뜬금없이 ‘자네도 미리미리 건강 챙겨’라는 생뚱맞은 조언까지 듣고는 공기밥을 시켜서 된장찌개에 비벼 빡빡 다 긁어 먹고 똥배 두드리며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 기승했다. 시집이라야 쓰레받기에 쓸어 담듯 달랑 한 권 내었지만 나도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을 대충은 알겠는데, 돼먹지 않은 시나 드문드문 쓰는 쓸모없는 일보다는 가슴에 띠라도 비스듬히 둘러야하지 않겠냐는 생각.

나 또한 기타 등등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왔고 그러는 동안 요긴했던 분노들은 다 ‘내 생을 떠나버렸’지만, 짱돌 하나쯤은 집어 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내내 얼어붙은 마음을 지배했다. ‘내 바다 속 깊은 슬픔’과도 아무 상관없는 헛된 고민, 헛된 노여움일지라도.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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