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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 할머니, 안녕!

칠부능선 2013. 1. 25. 09:32

도요 할머니, 안녕!

 

임철순

 


사람은 누구나 다 상처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도 있지만, 상처 없이 자라서 상처 없이 살다가 상처 없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그가 나이 들면서 함께 자라납니다. 자신만의 상처를 어떻게 다스리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크기와 폭이 결정됩니다. 그러니 마냥 상처에 짓눌려 괴로워하거나 구애되기보다 친구처럼 데리고 살면서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신달자 시인의 시 <열애>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손을 베었다/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잘되었다/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상처를 혀로 쓰다듬고/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상처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이를 통한 생명의 고양을 위해 상처를 덧나게 하겠다는 사랑에 대한 인식이 치열합니다. 외면하고 떠밀어내려 했던 것들, 그런 것들의 고통을 껴안는 새로운 자세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안진 시인은 어느 강연에서 “살면서 우리는 무수한 상처를 받는다. 남들이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에도 상처를 받는다. 시를 읽으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시를 이해할 때 상처가 치유된다. 상처는 좋은 거다. 상처에 상상력을 바르면 예술이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상처에 바르는 상상력이 상처를 말끔히 없애는 치료제는 아닐 것입니다. 상처를 완전히 없애면 그 살은 나의 살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죽은 듯한 나무에 새순이 돋듯 상처는 적절하게 되살아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처에 상상력을 바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상처와 예술, 상처와 시를 말하는 것은 지난 20일 타계한 일본의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柴田トヨ)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1911년에 태어나 102세 생일을 5개월 앞두고 떠난 도요 할머니도 상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유복한 쌀집의 고명딸이었지만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도요 할머니는 음식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20대에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33세 때 음식점 주방장과 결혼해 이듬해 외동아들을 낳았습니다. 92세가 돼서야 시인인 아들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한 도요 할머니가 2010년에 낸 첫 시집 <약해지지 마(くじけないで)>는 시집으로는 일본에서 최초로 100만 부 이상 팔렸습니다.

남편 사별 후 21년을 혼자 살아온 도요 할머니의 만년은 시로 채워졌습니다. 나의 상처, 남들의 상처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작품들입니다. ‘무심코 한 말이/얼마나 상처 입히는지/나중에 깨달을 때가 있어//그럴 때 나는 서둘러/그이의 마음속으로 찾아가/미안합니다 말하면서/지우개와 연필로 말을 고치지// ’ <말>이라는 시입니다. 2011년 3ㆍ11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는 <재해민 여러분에게>라는 시에서 ‘여러분 마음속엔/ 지금도 여진이 와서/상처가 더/깊어졌을 것입니다/그 상처에/약을 발라주고 싶습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

사람들은 쉽고 평범하지만 100년을 우려낸 차의 맛과 같다는 도요 할머니의 시를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위안과 감동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살할 생각을 버린 사람들도 있다니 할머니는 여러 사람의 생명까지 구한 셈입니다. 할머니의 고향 도치기(木)현의 후쿠타 도미카즈(福田豊一) 현장은 “인생 자체를 읊은 할머니의 시는 일본 전국에 용기와 감동을 주었다.”며 “국민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제 3의 시집을 내지 못해 아쉽다.”고 애도했습니다.

할머니의 시 등단 계기가 된 산케이(産經)신문 독자 투고시의 한 담당자 신카와 가즈에(新川和江) 씨는 이렇게 작별을 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많았지만 도요상의 시는 순박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90이 넘어 시작(詩作)을 시작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뭣이든 한 가지 일을 계속하면 만족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많은 노인을 격려했다고 생각합니다. 도요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에게>라는 시를 읽으며 도요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보다 훨씬 더 상처가 많고 할 말이 많을 우리 할머니들도 이렇게 시를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깊고 큰 상처에 아름답고 원숙한 상상력을 바르면서. ‘뚝뚝 수도꼭지에서/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언제까지 끙끙 앓고만 있으면 안 돼//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단숨에 눈물을 흘려버리는 거야//자, 새 컵으로 커피를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