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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앓는 병 / 전혜린

칠부능선 2010. 9. 4. 10:19

가을이면 앓는 병 

전혜린



  이 결별과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이다.

  가을처럼 여행에 알맞는 계절이 또 있을까? 모든 정을 다 결별하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엷어진 일광과 냉랭한 공기 속을 어디라고 정한 곳 없이 떠나 버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난다. 매일 매일의 궤도에 오른 생활이 뽀얀 오후의 먼지 속에서 유난히 염증나게 느껴진다. 여름의 생기가 다 빼앗아가 버린 나머지의 잔해처럼 몸도 마음도 피로에 사로잡히게 되고 생 전반에 대한 지긋지긋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럴 때 어디로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출발을 생각하며 자기의 정해진 궤도 밖으로 튀어 나갈 생각에 몸부림친다. 이 결별과 출발의 집념은 매년 가을이면 나에게 다가오는 병마(새로운 빛과 음향 속으로의)로서 그 생각 끝에 결국 "죽음"이라는 개념에 고착해 버리고 마는 까닭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긴 여행 - 돌아오지 않는 여행, 깨어남 없는 깊은 잠, 이러한 것들이 가을이면 매년 나의 고정 관념으로 되어 버린다.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의 냉기와 검은 빛과 조락은 나에게는 너무나 죽음을 갈망하는(Todessehnsuchtig) 자태로 유혹을 보내온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몇 주일이나 학교도 못 나오게 되고 앓아 눕게 된다. 의사는 신경의 병이라지만 나 자신은 내가 "존재에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생(生)과 사(死)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불면 불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사에 대한 생각이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가을은 토카이의 시 속에서처럼 저녁 노을에 박쥐가 퍼덕거리는 숲을 지나서 오솔길을 한없이 걸어가다가 길목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가 "어린 포도주와 파란 호두"를 먹고 죽음 속으로 비틀 거리며 들어가 버리기에 꼭 적합한 계절인 것만 같다.

  괴로와하고 모든 것에서 공허와 권태와 몰락만을 발견하게 되고 죽음에의 항로에의 유혹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받고 생의 의지가 거의 마비되어 버리는 몇 주일을 꼭 겪어야하는 것이 나의 가을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무서워한다. 그리고 싫어한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어둡고 무겁고 괴로운 몇 주일을 올해도 얼마 전에 보내고 났다.

  매일 커튼을 검게 방 둘레에 치고 어스름한 박명(薄明) 속에 누워 있었다. 아무 소리도 말 소리도 내지 못하게 집안 식구에게 이르고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이 조금이라도 짙은 날에는 두꺼운 검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열흘쯤 이렇게 앓고 나니 다시 일어나서 사물을 예전과 같은 각도에서 볼 힘이 어디선지 솟아났고 가을은 깊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