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스물과 쉰 / 장영희

칠부능선 2010. 9. 6. 12:35

 

스물과 쉰

장영희  




  오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때는 어떤 개인 회사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친구는 벌써 5, 6년 전에 소위 ‘명퇴’를 당하고 그냥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아직도 일하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디 가나 무용지물 퇴물내기니… 봉사 나가는 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더라구. 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살아서 모를 거야. 난 젊은 애들 앞에서 주눅 들어.”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얘, 주눅은 무슨 주눅! 죽자 사자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 지었어?”      


  친구가 간 후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배가 고파 지하 식품 매장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층을 가로질러 가는데 얼핏 화장품 카운터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오후가 되니 화장이 들떠 입가의 팔자주름은 마치 가뭄에 논 갈라지듯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눈 밑 주름은 더욱 자글자글해 보였다. 나잇살인지 청승살인지, 젊을 때보다 더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날이 갈수록 몸무게가 더 늘더니 이제는 아예 얼굴이 어깨에 딱 붙은 듯, 목은 아주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나이 들수록 식탐은 더 심해지는지 늘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 일은 행복한 고민이다. 냉면을 먹을까, 칼국수를 먹을까, 아니면 비빔밥? 이리저리 음식 부스를 기웃거리는데 유리 케이스 안에 먹음직스러운 마끼(일본식 김밥)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다가가자 젊은 여종업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마끼를 먹을까… 레인보우? 크런치?’난 여러 가지 색깔의 날치알과 야채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끼들 중 ‘레인보우’라고 쓰인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 맛있어요?”


“그럼요, 맛있어요. 근데 그건요, 젊은 분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나이 드신 분들은 그냥 프라이드를 많이들 드세요.” “그냥 프라이드 ?” 즉 괜히 새로운 것 먹으려는 당치 않은 생각 말고 구구스리 먹던 것이나 먹으라는 말로 들렸다. “늙으면 먹는 것도 다른가요?” 반기를 들려고 눈을 든 순간 나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야들야들하고 투명한 피부, 윤기 나는 검고 싱싱한 생머리, 탱탱한 가슴, 그리고 그렇게 작은 공간에 어떻게 내장이 다 들어 있을지 의심이 갈 정도의 가늘고 얇은 허리-아니 그보다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는 당당한 젊음의 위력에 나도 주눅 들었기 때문이다. 이 늘어진 뺨으로, 군살 붙은 아랫배로 언감생심 내가 젊은이들이 먹는 레인보우 마끼를 먹는 새로운 모험을 하려고 했다니…. “그럼 그냥 프라이드로 주세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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