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38

지독한 끌림 / 정봉채

사진작가가 한 장의 작품을 건지기 위해 2천 번의 셔터를 누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정봉채 작가는 8천 컷을 찍어서 한 작품을 건지기도 한단다. 20년 동안의 치열한 기록이다. 비구상 작품 같은 사진의 여백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 풍토병 -- 이른 새벽부터 늪에서 뿜어 나오는 입김을 온몸으로 맞으며 안개 속에서 촬영을 한다. 사진 작업이란 시간을 정해놓고 어떤 장면을 찍는 것이 아니다. 심상에 그려지는 한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무량한 시간을 찍고 또 찍어야만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거의 매일, 하루에 2천 텃에서 3천 컷의 사진을 찍는다. -- 늪가의 나무같이 늪에 오래 머무른 내 몸도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병으로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습진으로 가려워 밤새 온몸을 긁기 일쑤다. 고통으..

놀자, 책이랑 2022.05.01

파친코 / 이민진

한국계 1.5세대 작가, 영어로 쓴 소설이 27개국어로 번역되고, 애플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정서에 몰입하여 한국 사람이 느꼈던 감정을 느끼기를 원한다는 하버드대 강연을 보며 나는 홀딱 빠졌다. 알라딘에 주문하니 일시 중단되었단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작년에 읽었다며 바로 갖다주었다. 1판 26쇄다. 1, 2권 단숨에 읽었다. 원문에는 사투리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예일 대학시절, 재일한국인을 돕던 백인 선교사로 부터 13살짜리 재일한국인 소년의 투신자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구상, 재구상해서 30년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초고를 여러 번 쓰고 나서 저는 독자를 다른 방식으로 정말 존경하게 됐..

놀자, 책이랑 2022.04.28

아네스 바르다의 말 / 아네스 바르다, 제퍼슨 클라인

몇 해 전, 을 본 게 아네스 바르다와 첫 만남이었다. 이 책은 1962년부터 2017년까지 55년간 바르다가 행한 20편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바르다는 늘 경계에 서 있었다. 자신을 주변인이라 여기며 늘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사진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설치 예술로 새 영토를 개척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과 교감하며 자신만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표현했다. 누벨바그의 대모로 칭하는 그는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욕을 보인다. 암 합병증으로 90세에 사망. * 피에시 : 의뢰받은 영화를 만들면 아무래도 풍자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나요? 바르다 : 저는 풍자적인 영화를 만들지 않아요. 웃는 건 좋아하죠. (이 영화의 제목을 '에덴동산'이라고 지을까도 생각 했어요.) 하지만 풍자는 누군가를 조롱하..

놀자, 책이랑 2022.03.31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에릭 와이너가 기차여행을 하면서 철학자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섭렵한다. '빌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드 보통의 통찰력'을 가진 매력적인 글솜씨라는 에릭 와이너, 그를 처음 만난 나는 시작보다 뒤로 갈수록 많은 포스트잇을 붙이게 되었다. *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수단만 있을 뿐, 그 끝은 없었다. (51쪽) * 소로가 받은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

놀자, 책이랑 2022.03.27

무죄 / 오정순 디카시집

초대회장인 오정순 선배의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했다. 저녁에 주문했는데 새벽에 문앞에 와 있다. 알라딘 총알배송이다. 단숨에 읽었다. 순간포착에 영성 깊은 시가 어우러져 여운이 깊다. 끊임없는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25년 인연, 내 시작 모습을 다 기억해주는 선배다. 내가 등단했을때 불러서 집밥을 해주고, 선물 상자를 줬는데... 그때 카드로 쓸수 있는 멋진 사진과 고운 선물 봉투들, 빼곡한 축하와 덕담들... 그야말로 보물상자를 오래오래 썼다. 감동의 순간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내 책 나올 때마다 불러서 근사한 곳에서 밥을 사주고 선물도 많이 받았는데...

놀자, 책이랑 2022.03.22

용재총화 / 성현

500년 저 너머 사람 성현(1439~1504)의 글이다. 세종 연간에 태어나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세 임금을 차례로 모시며 높은 벼슬을 했다.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비평가, 탁원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용재총화』는 일곱 개의 장으로 먼저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람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의 일화 및 점잖고 근엄해 보이는 사대부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으며, 호기가 넘치는 영웅과 지사의 일화, 백성의 해학이 담긴 민담과 소화, 오싹하고도 가엾은 귀신 이야기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풍속 이야기를 담았다.' 역자의 소개는 거창하나 그야말로 문학적 장치 없는 옛날이야기다. 같은 글을 어찌 해..

놀자, 책이랑 2022.03.09

김선우의 사물들 / 김선우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3시까지 읽었다. 잠이 오면 좋고, 잠이 오지 않아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좋다. 가끔 떡실신도 하니 걱정할 건 없다. 눈이 너무 아플때는 책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어놓고 눈 감고 있으면 어느새 잠들고 ... 오래 전, 내가 문단에 입문했을때 오선생님 따라서 간 명동 어딘가에서 '해외이주민을 위한' 공연에서 김선우 시인을 만났다. 문인과 가수의 콜라보다. 그때 해외에서 노동자들이 막 들어올 때였다. 고은 시인과 이야기 하면서 중간 중간에 가수 이은미가 노래를 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까칠한 시인의 모습, 이은미의 품 너른 성품을 느꼈다. 대담은 아슬아슬 했고, 노래는 좋았다. 그래, 김선우 시인도 아주 젊을 때다. 이 책을 보니 그간 흐른 시간이 느껴진다. 민감함은 여전하지만 많이 ..

놀자, 책이랑 2022.03.05

사실들 / 필립 로스

부제 필립 로스의 이 자서전은 바로 전에 읽은 이전 작품이다. 작가의 일상은 소설의 모티브가 된다. 인생 편력이 곧 여성 편력이기도 하다. 그 특별한 인간관계에서 얻은 경험이 소설에 어떻게 펼쳐졌을지 그의 소설이 궁금해진다. 작가적 분신이기도 한 작품의 주인공 '주커먼'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고 주커먼이 작가, 로스에게 보내는 편지로 마친다. 2018년 5월 22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85세) *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건 허구적 자기 전설을 지어내느라 탈진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신경쇠약에 대한 자연스러운 치료적 반응인 것만도 아니며, 1981년에 일흔 일곱의 나이로 나에겐 여전히 불가해하게만 여겨지는 죽음을 맞이하신 내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대한 일시적 처방이자, 삶의 종말이 면도할 때 보는 거울..

놀자, 책이랑 2022.03.01

아버지의 유산 / 필립 로스

미국의 명망 있는 모든 상을 휩쓴 작가, 필립 로스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록한 글이다. 작가로서는 성공했으나 이혼하고 자녀도 없는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다. 뇌에 큰 종앙이 있고, 오른쪽 눈 시력이 거의 없고, 안면신경마비상태다. 그럼에도 정신은 누구보다 맑고 명석하기까지 하다. 총을 들고 유대인 노인을 노려 강도짓을 하는 흑인 소년에게 한 행동이며, 의사에게 자기 병에 질문하는 것이며, 똥을 싸고 한 행동이며... 오래 남을 장면이 많다. *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네 단어, 그전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해본 적이 없는 네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그것은, 그 네 단어는 먹혔다. 나는 쉰다섯이고, 아버지는 여든..

놀자, 책이랑 2022.02.23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71년생 김지수가 88세 이어령 선생님을 매주 화요일 찾아가서 나눈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묻는 이 애잔한 질문의 아름다운 답이다. 더불어 고백건대 내가 인터뷰어로서 꿀 수 있었던 가장 달콤한 꿈이었다.' PS. 선생님은 은유가 가득한 이 유언이 당신이 죽은 후에 전달되길 바라셨지만, 귀한 지혜를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 싶어 자물쇠를 푼다. (감사하게도 그가 맹렬하게 죽음을 말할수록 죽음이 그를 비껴간다고 나는 느꼈다.) ' 2005년, 현대수필 특강에 초대해서 가까이서 본 일이 떠오른다. 그 반듯한 용모와 카랑카랑한 음성이 선하다.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우리 엄마 말도 떠오르고. 선생님은 암에 걸렸는데 전이된 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다. 암, cancer는 라틴 말..

놀자, 책이랑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