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36

새벽에 홀로 깨어 / 최치원

'새벽에 홀로 깨어'를 한 밤중에 홀로 읽었다. 단촐한 시문선집이다. 최치원은 신라 시대 사람으로 12살에 당나라로 유학가서 6년만에 반공과(그곳의 과거 혹은 고시) 에 합격하고, 일찌기 문명을 떨쳤다. 신라로 돌아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하고 은거, 사망 년도를 모른다. 어느 시대나 개혁파는 외롭다. 그러나 그들의 피땀으로 사회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유 불 선을 통달한 올곧은 지성인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 받아주질 않는다. 그 벽은 어느 시대나 높다. 어린 유학생 시간의 심경이 오롯이 담겨 있는 시문이 처연하다. 문집은 '신라의 위대한 고승'들을 소개와 '참 이상한 이야기'는 설화같다. 명문장가로 알려지게 한 '토황소격문' 은 고변의 종사관로서 지은 글이다. 공문서에 가까운 글을 4년 동안 만 ..

놀자, 책이랑 2022.06.26

나 홀로 간다 / 정승윤

왠지 푸른 배경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단단한 표지는 오래 소장하라는 권고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니 여린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투구같다. 저 홀로 서 있는 나무들, 숲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저 홀로 쓸쓸하다. 표지가 전하는 깊은 가을 숲의 스산함에 빠져 단숨에 읽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만난 정승윤 선생님은 단아했다. 언듯 비치는 유머에 멋쩍은 웃음을 짓던 시간을 소환한다. 작가의 쓸쓸함과 슬픔이 달큰하게 읽히는 것 뭔가. 이미 세속 잣대를 벗은 관조와 내공의 결과인듯, 반갑다. 작가의 말 ... 나의 슬픔의 글들은 단지 자기 연민이라든가 자기 위로의 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당신도 역시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을 반영한다. 나는 결국 공감을 ..

놀자, 책이랑 2022.06.25

붉은산 검은피 / 오봉옥

33년만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 시집은 오봉옥 시인의 아픈 손가락이다. 이 시집으로 인해 여러 명이 감옥에 가고, 시인도 수감생활을 했다. 판매 금지된 시집을 새로 출간했으니, 시인도 독자도 감격이다. 이데올로기로 내몰았지만 우리말이 살아 꿈틀댄다. 피로 물든 역사의 뒤안길을 아득한 마음으로 따라 간다. 들어보소, 녹두벌 새 울음 좀 들어보소 1 어버지여 아버지여 당신께서 맨지게에 나무 석 짐 휘엉청 지고 지게 목발 끌며 소를 몰고 끈덕끈덕 돌아오실 때에 머얼리선 바알간 석양이 당신의 이랴이랴 소리에 궁둥이를 슬쩍슬쩍 틀었지요 그때면 싸립에 섰던 아이가 아버지 하며 쪼르르 달려와선 소고삐를 얼른 잡았고요 음매! 음메에! (하략) (12쪽) 사평아재, 싸게 와서 이야그 한 자락 펼쳐보소 1 석이는 사평아제..

놀자, 책이랑 2022.06.21

자궁아, 미안해 / 이영희

등단 17년 차 이영희 작가의 첫 수필집이다. 묵은지처럼 깊은 맛이 있다. 오래 전 이지의 『분서』 원문으로 필사했다는 말을 듣고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 시간 다졌지만 가뿐하게 정리했다. 솔직 발랄도 하다. 이영희씨에 대한 기억은 유쾌, 통쾌한 유머가 압권이다. 표지그림도 직접 그렸다. 화려한 모습 이면의 수줍은 내면이 얼비친다. 겸손이 지나쳐 자주 숨는다. 이제 다 아팠으니, 앞으로는 훨훨 날개 펼치길 바란다. 박수보낸다. 책을 펴내며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이 남긴 유명한 말, "당신이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아직 쓰인 게 없다면 당신이 써야 한다." 그녀는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을 향해 예리하며 절박한 목소리를 내고 싶기에 저만큼의 단단한 각오를 다졌을 것이..

놀자, 책이랑 2022.06.09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 / 노혜숙 포토에세이

반듯하고 성실한 인상, 몇 번 만난 노혜숙 작가의 느낌이다. 포토에세이는 일단 사물을 대하는 남다른 시선과 감각이 필요할 듯하다. 정물화, 풍경화 같은 사진은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비구상으로 다가오는 사진은 상상력을 이끈다. 꾸준히, 치밀하게 잘 쓰는 작가의 내공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풍경과 나란히 놓인 짧은 글에 긴 숨이 따라온다. 찬찬히 음미하며 '쓸모없음의 쓸모'에 '스미'며 오래 '뒤척'일 것 같다.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을 때까지. 프롤로그 처처가 안갯속이었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임을 늦게야 알았다. 안갯속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 많은 궤적들이 그늘에 닿아 있다. 그 언저리에서 볕을 품고 싶었던 안간힘, 그 편린들을 사진과 짧은 글로 엮는다. 변변찮은 다짐들이 많을 것이다. 그대로 나다..

놀자, 책이랑 2022.06.05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위화

『허삼관 매혈기』 가 떠오르는 소설가 위화의 산문집이다. 2016년에 쓴 이 책은 여전히 현장성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 더우기 오늘, 영화 을 보고 맘이 착잡하다. 오는 길에 지방선거 서전투표를 했다.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니 무거운 마음이 더 깊어진다. * 10년 전 『인생』을 발표했을 때, 몇몇 친구들이 놀렸다. 그들의 예상과 달라서였다. 그들이 보기에 아방가르드 작가가, 갑자기 전통적 의미의 소설을 쓴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그들에게 한마디로 답했다. "하나의 유파만을 위해 창작을 하는 작가는 하나도 없어. " (60쪽) * 상상의 함의란 무엇인가? 여러 해 전, 나는 잡지 에 수필을 쓰면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때는 그저 피상적으로 언급했는..

놀자, 책이랑 2022.05.27

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마음이 분주할 땐 시집이 좋다. 시집 열두 권의 선집이다. 옮긴이의 해설까지 500쪽에 가깝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진솔하고 소박한 수상 소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수상 소감의 맺는 말이다.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아무 것도 없다. 시인이 되긴 글렀나 보다. *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놀자, 책이랑 2022.05.21

하늘의 피리 소리 / 맹난자

오래 잡고 있었다.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쉬이 넘길 수가 없다. 꼭꼭 씹어 먹어야 소화가 되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영양 많은 견과같이, 하루하루 양식으로 곱씹는다. 가까이 두고 자주 펼쳐 읽으며 나를 일깨울 것이다.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한 시대의 병은 사람의 '양식 변화'로 치료된다"고 말한 이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사람의 '사유'가 삶의 양식 변화를 일으킨다며 삶을 변화시켜야 진짜 철학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생각이 바뀌어야 삶이 달라진다. 하여 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철학자, 그리고 경전과 고전문학 속에서 자신의 편견과 오류를 정정하고 바른 사유의 전환을 돕는 내 나름의 안구眼句를 뽑아보았다. 그러나 내 시야란 자신의 한계까지임을 밝힌다. 그동안 생의 기준이..

놀자, 책이랑 2022.05.13

지독한 끌림 / 정봉채

사진작가가 한 장의 작품을 건지기 위해 2천 번의 셔터를 누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정봉채 작가는 8천 컷을 찍어서 한 작품을 건지기도 한단다. 20년 동안의 치열한 기록이다. 비구상 작품 같은 사진의 여백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 풍토병 -- 이른 새벽부터 늪에서 뿜어 나오는 입김을 온몸으로 맞으며 안개 속에서 촬영을 한다. 사진 작업이란 시간을 정해놓고 어떤 장면을 찍는 것이 아니다. 심상에 그려지는 한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무량한 시간을 찍고 또 찍어야만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거의 매일, 하루에 2천 텃에서 3천 컷의 사진을 찍는다. -- 늪가의 나무같이 늪에 오래 머무른 내 몸도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병으로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습진으로 가려워 밤새 온몸을 긁기 일쑤다. 고통으..

놀자, 책이랑 2022.05.01

파친코 / 이민진

한국계 1.5세대 작가, 영어로 쓴 소설이 27개국어로 번역되고, 애플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정서에 몰입하여 한국 사람이 느꼈던 감정을 느끼기를 원한다는 하버드대 강연을 보며 나는 홀딱 빠졌다. 알라딘에 주문하니 일시 중단되었단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작년에 읽었다며 바로 갖다주었다. 1판 26쇄다. 1, 2권 단숨에 읽었다. 원문에는 사투리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예일 대학시절, 재일한국인을 돕던 백인 선교사로 부터 13살짜리 재일한국인 소년의 투신자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뇌리에 박혀 구상, 재구상해서 30년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초고를 여러 번 쓰고 나서 저는 독자를 다른 방식으로 정말 존경하게 됐..

놀자, 책이랑 2022.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