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단정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뤄두었다.
왜관수도원을 가면서 이 책 한 권을 넣었다.
오후에 도착해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소박한 나무 책상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읽어내렸다.
문혜영 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니 더 속이 쓰린다. 그저 주신 시간이 아니다.
무슨 큰 뜻이 있어 이리 연단하시는지...
그 뜨거운 숨결에 나는 머리를 조아린다.
* 시인의 말
마법 같은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봄을 허락하셨다.
생명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맹수의 숨결,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수년째 마주하고 있다.
그 두려움으로 때론 단단한 얼음이 되고
그 고통으로 때론 하얗게 재가 되지만
그 무지함 앞에선 늘 헐벗은 알몸이 된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그를 다스려라
끊임없이 들려오느 목소리!
짓눌려 끌려가지 않으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 응시해라.
계절이 여러 번 흐르는 동안
아픔과 눈맞춤 하며 녹여낸 시들
이렇게 품어낸 숨결이
고통을 공감하는 누군가에겐
궂은 비 지난 뒤
낙수로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처럼,
해풍 걷힌 뒤
모래톱에 남겨진 물새 발자국처럼,
가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2024 희수를 맞으며, 문혜영
* 나대지 마
4기입니다, 선언에
안개 저편으로 밀어낸
절망이
해일로 덮쳐 왔다
이번 협곡은 얼마나 험난할지
모든 걸 기억하는 몸이
혈압 맥박 널뛰기 시키며
비상사태를 알린다
나대지 마
괜찮아
마음이 몸을 어른다
두려움이 두려움을 애써 달랜다
(31쪽)
* 마음이 몸에게
몸을 부린다는 말,
용서해라
여태껏 널 부리는 줄 았았네,
네가 힘을 잃어 주저앉으니
눈멀어 귀 멀어 방향을 잃네
이제 보니
네가 날 부렸었구나
(118쪽)
* 삶은 거품이 아니라고
11월, 첫눈이 온다
거리에 나섰다가
대책 없이 눈을 맞는다
눈발에 납작해진 가발
젖으면 젖는 대로
삶은 거품이 아니라고
징하게 첫눈이 흩날린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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