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숨결 / 문혜영

칠부능선 2024. 4. 11. 23:29

이 시집은 단정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뤄두었다.

왜관수도원을 가면서 이 책 한 권을 넣었다.

오후에 도착해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소박한 나무 책상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읽어내렸다.

문혜영 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니 더 속이 쓰린다. 그저 주신 시간이 아니다.

무슨 큰 뜻이 있어 이리 연단하시는지...

그 뜨거운 숨결에 나는 머리를 조아린다.

 

* 시인의 말

마법 같은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봄을 허락하셨다.

생명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맹수의 숨결,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수년째 마주하고 있다.

그 두려움으로 때론 단단한 얼음이 되고

그 고통으로 때론 하얗게 재가 되지만

그 무지함 앞에선 늘 헐벗은 알몸이 된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그를 다스려라

끊임없이 들려오느 목소리!

짓눌려 끌려가지 않으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 응시해라.

계절이 여러 번 흐르는 동안

아픔과 눈맞춤 하며 녹여낸 시들

이렇게 품어낸 숨결이

고통을 공감하는 누군가에겐

궂은 비 지난 뒤

낙수로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처럼,

해풍 걷힌 뒤

모래톱에 남겨진 물새 발자국처럼,

가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2024 희수를 맞으며, 문혜영

* 나대지 마

4기입니다, 선언에

안개 저편으로 밀어낸

절망이

해일로 덮쳐 왔다

이번 협곡은 얼마나 험난할지

모든 걸 기억하는 몸이

혈압 맥박 널뛰기 시키며

비상사태를 알린다

나대지 마

괜찮아

마음이 몸을 어른다

두려움이 두려움을 애써 달랜다

(31쪽)

* 마음이 몸에게

몸을 부린다는 말,

용서해라

여태껏 널 부리는 줄 았았네,

네가 힘을 잃어 주저앉으니

눈멀어 귀 멀어 방향을 잃네

이제 보니

네가 날 부렸었구나

(118쪽)

* 삶은 거품이 아니라고

11월, 첫눈이 온다

거리에 나섰다가

대책 없이 눈을 맞는다

눈발에 납작해진 가발

젖으면 젖는 대로

삶은 거품이 아니라고

징하게 첫눈이 흩날린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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