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부끄러움 / 아니 에르노

칠부능선 2022. 10. 18. 21:17

짧은 소설에 작품 소개가 먼저 나온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된다는 것 -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어떤 '부끄러움' - 신수정

소설 뒤에는 옮긴이의 해설도 있다. 여자들의 조건과 사회적 세계의 구조에 대한 돌이킬수 없는 의식화 - 이재룡

그리 난해한 글도 아닌데... 

2003년 <아니 아르노상>이 제정된 것을 보면 이렇게 체험으로 쓴 소설이 주목받고, 아니 에르노라는 장르가 된 것이다.

체험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문학이 어디 있으랴만은 수필의 강점이 체험이 아닌가. 수필가들이 자긍심을 좀더 가져야 할 것 같다. 어디까지 솔직하게 토로하느냐가 관건이긴 하다. 

 

 

"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로 시작하는 12살 때의 기억이다. 아빠가 '불행을 벌어놓은 것이야' ('불행을 벌다'는 표현은 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의 노르망디 사투리.) 1952년 6월 15일, 유년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기억이다.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었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 아니 에르노

* 내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생각할 때 사용했던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정상적인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995년의 나라는 여자는, 조그만 자기 도시와 자기 가족 그리고 사립학교만 알고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되었던 1952년의 소녀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 그 소녀 앞에는 살아야 할 무한한 시간이 놓여 있었다. (47쪽)

* 예의는 주도적 가치이자 사회적 판단의 첫 번째 원칙이었다.

예를 들면, 식사 초대나 선물을 받으면 갚아야 하고, 새해 인사를 할 때 철저히 나이순에 따라야 하며, 직접 대놓고 질문하거나 예고 없이 방문해서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되고 ... (73쪽)

*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117쪽)

* 195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오오카 쇼헤이의 <불>이란 책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회상도 하나의 체험이다."

비아리츠의 사진들을 본다. 아버지는 이십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사진 속 여자아이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내게 이 책을 쓰게 만든 6월 일요일의 그 장면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장면은 결코 내 마음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이 작은 여자아이와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그 사건 뿐이다. 나의 정체성과 내 존재의 항구성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 오르가슴을 나는 그로부터 이 년 뒤에나 느꼈기 때문이다. 1996년 10월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