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붉은산 검은피 / 오봉옥

칠부능선 2022. 6. 21. 14:13

 

33년만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 시집은 오봉옥 시인의 아픈 손가락이다. 이 시집으로 인해 여러 명이 감옥에 가고, 시인도 수감생활을 했다.

판매 금지된 시집을 새로 출간했으니, 시인도 독자도 감격이다. 

이데올로기로 내몰았지만 우리말이 살아 꿈틀댄다. 

피로 물든 역사의 뒤안길을 아득한 마음으로 따라 간다. 

 

 

들어보소, 녹두벌 새 울음 좀 들어보소

 

1

어버지여

아버지여 당신께서 맨지게에 나무 석 짐 휘엉청 지고

지게 목발 끌며

소를 몰고 끈덕끈덕 돌아오실 때에

머얼리선 바알간 석양이

당신의 이랴이랴 소리에

궁둥이를 슬쩍슬쩍 틀었지요

그때면 싸립에 섰던 아이가

아버지 하며 쪼르르 달려와선

소고삐를 얼른 잡았고요

 

음매! 음메에!  (하략)

(12쪽)

 

 

 

사평아재, 싸게 와서 이야그 한 자락 펼쳐보소

 

1

석이는 사평아제를 기다리지

평양으로 청진으로 가서는

큰 산 뚫어 물 빼내는 일도 했다는

그런 신명 난 이야기를 기다리지

아이들은 밤새도록 닦달을 하고

구석에 쪼그려 앉은 가시내들도

그러고요 그러고요 하며 말꼬리 늘이고

거기서는 차도 다닌다 했지

"차가 뭐여라우?"

"소 구루마 같은 것이 오살나게 빠른데

가시내들이 차장을 한단다"

"차장이 주인이지라우?"

"아녀 돈 받아 태워주고 내려주는 노동자여"

"노동자는 뭣인디라우?"

"종이여"

거기엔 공장도 많다는데

공장이 학교만큼 크다며 웃어주었지

"근대 거그는 잘살 것지라우?"

"거기엔 농사가 별로 없어야

그래서 여그처럼 칡캥이나 나물이 아닌

하루 걸러 조밥도 먹는단다"

석이는 사평아재가 자랑이지

따땃한 봄날 아침에 핑 가서는

시월 그믐께면 이것저것 함빡 사올 

사평아제가

언젠가 지도 데리고 갈 거라며

삼백 날을 기다리는 자랑이지

(77쪽)

 

 

 

석아, 어쩌다 황량한 벌판에 우는 바람이 되었느냐

 

9

엄니가 술을 먹었시야

쌍촌할매 초상집 가서는

술을 함빡 묵어부렀시야

와서는 그랬시야

나 죽어도 지게송장일 거여

과부송장이야 지게송장도 싸지

아고아고 이제 가면 언제 올끄나

근디마다 애들아

배영양반이 그러더라

석이를 자기 아들 대신 징용 보내자 하더라

십 년이나 소작 준다고

미순이도 시집보내 준다고

일 잘하는 절동 기복이가 제일이다며

배명양반이 난리더라

아고아고 어쩔끄나 애들아

 

엄니가 술에 취했시야

곤드레만드레 속타령만 했시야

"나가 시집와서 석이 니를 밸 때여

고기 한번 묵어보는 게 소원인디

나가 지지리도 못나서 

고기 묵고 싶다는 말을 못 했어

그랑께 배는 부르고 오죽허것냐

속은 미슥미슥거리더니

꾸역꾸역 넘어올 판인디 오죽허것냐

살강에서 밥해도 부아가 나고

부새에서 불 때도 부글부글 끓고

한번은 삼바구니를 던져부렀어

긍께 삼이 다 헝클어져부렀지

말도 마라 니 애비가

밥은 안 하고 어먼 짓거리나 한다며

괭이 들고 밥솥을 찍어분다 하는디

금매 을메나 속이 떨린 일이냐

내사 잘못한 것이 있간디

유제 부끄렁께 밥솥을 쥐어 잡고

잘못했어라우 잘못했어라우 내동 빌었지

... 

(110쪽)

 

 

 

구천을 떠도는 바람아

 

5

1946년 11월 4일

 

왔네

미군 트럭이 

찝차가 왔네

여전히 시퍼런 총대를 메고

황량한 광산촌 구석구석 온 막장마다

뒤지고 뒤지더니 주동자라며

전평 간부 여섯을 끌고 가려 했네

아니 찬 바람이 살속 뼛속을 타고

오래도록 울어대는 날이었네

광산촌 늙은 할매도

이마 우에 도장버짐이 난 여섯 살

어린린 계집아이도 섰네

아짐씨는 아짐씨들대로 트럭 앞에 서서는

"못 가!"

"우리덜 다 죽이지 않고는 절대 못 가!"

미군 트럭 앞에 줄줄이 누웠네

거기 석읻 섰네

석이엄니 몸뻬바지 웃댕김 치고 섰네

그러나

아아 그때

미군 찝차가 움직이고

칼빈총이 불꽃을 뿜더니

트럭앞에 누운 사람들을 깔아뭉갰어

막아선 사람들의 머리가 으깨지고

가슴팍이 긴긴 피꽃을 뿜어버렸네

뿜다가 뿜다가

끝내는 살아 잇는 모든 것들도 

숨을 멈춰버렸네

(184쪽)

 

 

 

 

맺음시

 

기억하라

 

묻노라 양키들아

무덤에서 무덤으로 흐르는

치 떨리는 말 들어보았나를

다시 묻노라

무덤머리 우에 떠도는 저주 소리가

바로 네 목을 조이리라 속삭이는데

그걸 알고 있는지를

 

기억하라

어깨를 치는 이슬도

말도 마라고 다둑이는데

우리도 모르게 말하곤 했다

너에게만 적이라고

손목을 그는 바람도

그냥 가자고 재촉하는데

우리도 모르게 말하곤 했다

너에게만은 원수라고

 

다시 한 번 경해두련다

기억하라 양키들아

우리들의 전쟁은 끝나기 않았다

(191쪽)

 

 

* 김미옥 선생 글 퍼옴

- 붉은산 검은피 

어떤 시집은 몇 번을 읽어도 말하기 힘들다.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침묵하게 된다.
가슴이 답답해서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밤거리를 산책했다.
걸으면서 소문 무성했던 1989년을 생각했다.

그해 한 시인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때 작가 송기원도 다시 구속되었다.
송작가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문고리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를 다시 구속시킨 시집이 오봉옥의 『붉은산 검은피』이다.
당시 송기원은 이 시집을 발간한 실천문학사의 주간이었다.

나는 이산하의 『한라산』은 읽었지만 오봉옥의 『붉은산 검은피』는 읽지 못했다.
불온한 소문의 시집이 33년 만에 나타났다.
『붉은산 검은피』는 장편서사시다.
이 시는 ‘묻노라 양키들아/ 우리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로 끝을 맺는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시가 불온하다는 생각을 못하겠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는 버젓이 돌아다녔건만 이 시집은 이천 년대에도 ‘빨갱이 서적’이었다.
『붉은산 검은피』는 1946년에 일어난 ‘화순탄광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민초들을 위무한다.
해방된 이듬해 미군들이 최초로 광부들과 마을주민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이 장편서사시는 대대로 머슴이었던 ‘석이’네 가족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후 ‘화순항쟁’까지 힘없는 민초들의 서럽고 억울한 죽음들을 시인은 무당이 오구굿을 하듯 그 넋을 씻긴다.
이 장편서사시가 불온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사평아재가 나오고 있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만 먹고 자란/ 발이 굵은 옥문을 넘어오고 있네/ 기나긴 고문 속에서 잃었던/ 두 눈을 가까스로 찾고서도/ 그토록 메마른 눈물/ 아니 나이 어린 아내마저 잃고서도/ 울지 말자던/ 그 눈물을/ 말도 없이 주르르 주르르 흘리면서/
사평아재가 나오고 있었다 
     - 제6장 「욕봤네, 이젠 고문 없는 세상 사시게」 부분

독립운동을 했던 사평아재가 해방이 되자 출옥하는 장면이다.
한일합방은 민초들도 모르는 사이 기득권자들의 합의로 이뤄졌다.
세계 어느 나라가 싸워보지도 않고 국가를 내어준단 말인가.
언제나 대가는 민초들이 치른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가난은 해방되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떠나자 화순탄광의 광부들은 자치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해방군으로 진주한 미군정은 모든 재산을 군정청 소유로 선언하고 화순탄광의 광부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국가는 쌀을 달라고 저항하던 광부들과 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빨갱이’로 호도했다.

시인은 시어의 넋두리로 민초들의 영혼을 불러낸다.
살아서 지아비와 자식을 잃은 여인들이 접신 하듯 산자와 죽은 자가 눈물로 헝클어진다.
이 서사시가 빛나는 까닭은 원혼들을 위한 진혼가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억울하게 죽어간 모든 원혼들을 위한 씻김굿이 펼쳐진다.

*
이봐요 이봐요
삼대째 오대째 이어온 소작쟁이님
당신 아내가 종이고
당신 아비가 머슴이고
당신이 소작쟁이인데
해방이 다 뭣이다요
     - 제 7장 「석이 어메 화순탄광 찾아가네」 부분

시집을 읽고 한숨을 쉰다.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기득권자의 세상은 굳건하다.
식민지가 아닌 간섭기의 시대에 민초는 여전히 불안하다.
제발 깨어있기를.

 

 

 

- 김미옥 선생은 내가 페북에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

  참 고맙다.  반가워서 허락도 없이 퍼왔다. 

 

 

 

 

 

 

33년 전 고초를 겪은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