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나 홀로 간다 / 정승윤

칠부능선 2022. 6. 25. 17:31

왠지 푸른 배경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단단한 표지는 오래 소장하라는 권고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니 여린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투구같다.

저 홀로 서 있는 나무들, 숲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저 홀로 쓸쓸하다.

표지가 전하는 깊은 가을 숲의 스산함에 빠져 단숨에 읽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만난 정승윤 선생님은 단아했다. 

언듯 비치는 유머에 멋쩍은 웃음을 짓던 시간을 소환한다. 

작가의 쓸쓸함과 슬픔이 달큰하게 읽히는 것 뭔가. 

이미 세속 잣대를 벗은 관조와 내공의 결과인듯, 반갑다. 

 

 

 

 

작가의 말

 

 ... 나의 슬픔의 글들은 단지 자기 연민이라든가 자기 위로의 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당신도 역시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당신의 슬픔을 반영한다. 나는 결국 공감을 확신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글은 글도 아니다. 패배가 없는 인생은 인생도 아니다. 나는 패배에서 진정한 극복의 의지가, 슬픔에서 삶에 대한 진지한 관조와 성찰이 생겨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 2021년 1월 /  제주에서 정승윤

 

 

 

 

* 신음소리

 

  옆으로 돌아누운 아버지의 상반신이 그림처럼 고요하다. 나는 더 오래 기다린다. 과연 이것이 죽음인가, 아니면 모처럼 깊은 잠에 드신 건가. 나는 침대 옆에 쪼그린 자세로 손을 뻗을까 말까 한참을 더 기다린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기다리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31쪽)

 

 

 

 

 * 쑥대머리

 

 나 그대를 찾아가리다. 쑥대머리하고 귀신 형용하고 그대를 찾아가리다. 나 그대를 찾아가리라. 성성한 백발과 구름진 얼굴로 그대를 찾아가리라. 성성함 백발과 주름진 얼굴로 그대를 찾아가리다. 대지팡이 짚고 절뚝거리며 찾아가리다. 그대를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 먼 줄 몰랐소. 평생을 허비한 자가 다시 평생을 거슬러 찾아가리다. 다시 꽃 피는 시절에 꽃그늘 밟고 찾아가리다. 그러니 갈 길은 멀고 죽음은 나를 부르오. 죽음을 속이고라도 그대를 찾아가리다. 쑥대머리 하고 귀신 형용하여 죽은 자처럼 찾아가리다. 

(33쪽) 

 

 

 

* 지게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장모님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모시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갈 때마다 장모님의 눈빛이 너무 간절하다는 것이다. 나는 비좁은 장모님 집에서 함께 겪었던 일 년여의 지긋지긋한 간병의 기억을 떠올렸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실은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대답이든 위선적인 대답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생뚱맞게 어렸을 때 담벼락에 붙어 있던 '고려장'이라는 영화 포스터가 떠올랐다. 

(52쪽)

 

 

 

* 나 홀로 간다

 

  먼 길을 가려면 외로움이 있어야 한다. 혼자 들길을 걷기 위하여. 더 먼 길을 가려면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운 능선을 넘어야 한다. 그보다 더 먼 길을 가려면 경이로움이 있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점점 더 별들이 가까워지는 놀라운 숲길이 있어야 한다. 아주 먼 길을 가려면 채찍이 있어야 한다. 내 등을 후려칠 느린 슬픔의 채찍이 있어야 한다. 

(144쪽) 

 

 

 

* 추락한 천사

 

  나는 그의 추락에 충분히 공감하였다. 그의 큼직한 왼쪽 날개에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 보였으며 그래서 꺾인 오른쪽 날개는 더욱 비극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모든 추락하는 남성이 권위를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추락은 그만큼 장엄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여성들은 모두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며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남성들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처럼 보였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비참했으며 학교에서 선생들은 모두 비굴해 보였다. 

...   추락한 천사만이 오후의 고즈넉한 그늘에 잠겨있을 뿐이다. 그는 엄숙했으나 현대의 종교처럼 뇌가 없었다.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