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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우들이여, 안녕 / 이윤기

칠부능선 2018. 11. 11. 16:55

악우들이여, 안녕

이윤기

 

 

악우들, 술과 담배 이야기다.

술 마시는 버릇, 몸에 붙인 지가 꽤 오래 된다. 아무래도 명철 차례 끝나고 다량의 제주를 음복하면서 몸에 붙은 버릇 같다.

중학생 시절에 이미 명절이면 거나하게 취한 채 건들거리고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이 시작되고부터는 상습적으로 술을 마셨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작정한 청소년들에게 적당한 음주가 그 시절에는 무슨 특권 같은 것이었다.

담배는 입대하면서 피우기 시작했다. 한국인 남성에게 군대살이는 피할 수 없는 의무였고 술과 담배는 이 의무를 수나롭게 수행하자면 피하기

어려운 기호품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과 담배, 40년 이상 나와는 애증으로 얽힌 악우들이다.

우리 어리던 시절, 술을 예찬하는 글들은 또 어찌 그리 흔하던지. 시인이라면 한 번쯤 음주를 예찬하지 않으면 안 되어 보일 지경이었다.

교과서에서도 음주 예찬을 가르쳤다. 17세기 조선 시대의 문신 송강 정철의 술 권하는 노래 「장진주사」가 있었을 정도다.

“꽃 꺾어 술잔 수 세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구절은 우리같이 어린 술꾼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던가?

건방기가 넘치는 청년에게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다음과 같은 시는 거의 맹독 수준이 아니었겠는가?

이상은의 주장에 따르면 술은 마음을 해치는 것이지 몸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 인심이 사나워 새 친구는 만나기가 어렵고 옛 친구 좋은 연분은 끊긴 지 오래, 애끓어 마시는데

   술값 몇 천 냥쯤이야.

 

송나라 사람 황정견은 “미쳤다고 술을 말리느냐.”는 말로 우리를 부추겼다.

 

국화 송이에 냉기가 도는데,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술잔을 말리는가……취중에 머리에 꽃 꽂으니……

황국과 백발이 어울리지 않으면 어떠랴. 괴념하지 않으련다.

 

우리들의 우상 샤를 보들레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느 날 밤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했다.

인간이여, 오 실격한 자식이여,

내 유리의 감옥과 주홍빛 봉랍 아래서

그대를 향하여 불러 주리라.

광명과 우애 넘치는 노래를 …

 

… .

하여튼 많이 마셨다. 그런데, 무서워라. 술이 슬슬 나의 몸과 마음의 주인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나의 삶과, 내가 얽혀 있는 모든 관계들을 지배하려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 연말 술의 등을 돌려 세워 등을 떠밀었다. 그날 담배도 내 집에서 쫒겨났다. 아무리 악우들이지만 둘을 한꺼번에 돌려 세우고 나니 굉장히 허전하다.

술을 끊기고 한 것은 처음이지만 담배는 10년 전에 한 6개월 끊은 적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나는 긴요한 볼일로 일본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도쿄로 들어오는 길에 본 담배 광고 문구 하나 때문에 나의 6개월 공력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보라.

 

담배는 마음의 일요일 (タバコは心の日曜日)

 

나는 지금 정신이 나간 나머지 술잔을 말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술을 마시지 않아서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하는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담배를 끊음으로써 마음의 일요일을 잃어버린 것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담배는 입에 대지 않겠지만 식탁의 와인 한 잔은 사양하지 않을 것 같다. 술과 담배와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내 싸움에서 얻은 충고 한 마디.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고 나는 무척 힘들었다. 따라서 각개격파가 현명하다.

그러거니, 이제 마음의 일요일도 없는 곳으로 떠나니 악우들이여, 안녕.

 

- 이윤기 유고 산문집 『위대한 침묵』에서